卒業論文(碩士學位論文)
성공적인 미래 목회사역에 관한 연구
목 차
Ⅰ. 序 論
A. 연구동기와 목적 ‧‧‧‧‧‧‧‧‧‧‧‧‧‧‧‧‧‧‧‧‧‧‧‧‧‧‧‧‧‧‧‧‧‧‧‧‧‧‧‧‧‧‧‧‧‧‧‧‧‧‧‧‧‧‧‧‧‧‧‧‧‧‧‧
B. 연구 범위와 방법 ‧‧‧‧‧‧‧‧‧‧‧‧‧‧‧‧‧‧‧‧‧‧‧‧‧‧‧‧‧‧‧‧‧‧‧‧‧‧‧‧‧‧‧‧‧‧‧‧‧‧‧‧‧‧‧‧‧‧‧‧‧‧‧
Ⅱ. 本 論
A.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의미
1.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
2. 신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
3. 역사속의 목회자
a. 초대 교회
b. 중세 교회
c. 종교 개혁기
B. 목회자의 당면과제
1. 목회자의 자질과 자세
2. 목회자의 성결
3. 목회자의 사명
4. 목회자의 소명
5. 목회자의 설교
6. 목회자의 권위
a. 권위의 상실
b. 새로운 권위의 개발 및 회복
7. 목회자의 갈등(스트레스)
a. 압박감
b. 불안
c. 좌절
d. 갈등
e. 불확실한 영적 상태
8. 미래의 목회, 셀 목회란?
C. 목회자의 자기성찰
1. 목회자의 자아성찰
2. 목회자의 신앙적 성찰
3. 철두철미한 신앙심
4. 목회자와 성령
D. 현대 및 미래의 바람직한 목회자 상
1. 평신도가 바라는 21세기 목회자상
2. 21세기에 바람직한 목회자의 자질
a. 진실한 인격
b. 투철한 소명감
c. 민주적 지도자
d. 경건한 삶
e. 연구열
f. 온전한 헌신
3. 목회자의 영성 관리
E.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 방안
1. 목회자 리더십의 특징
2.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 리더십의 특징
3. 목회자 리더십 개발 전략
a. 자기 평가
b. 올바른 비전의 진술
c. 행정적 리더십
F. 현대 및 미래의 바람직한 목회자 象
Ⅲ. 結 論 ‧‧‧‧‧‧‧‧‧‧‧‧‧‧‧‧‧‧‧‧‧‧‧‧‧‧‧‧‧‧‧‧‧‧‧‧‧‧‧‧‧‧‧‧‧‧‧‧‧‧‧‧‧‧‧‧‧‧‧‧‧‧‧‧‧‧‧‧‧‧‧‧‧‧‧‧‧‧‧‧‧
참고문헌 ‧‧‧‧‧‧‧‧‧‧‧‧‧‧‧‧‧‧‧‧‧‧‧‧‧‧‧‧‧‧‧‧‧‧‧‧‧‧‧‧‧‧‧‧‧‧‧‧‧‧‧‧‧‧‧‧‧‧‧‧‧‧‧‧‧‧‧‧‧‧‧‧‧‧‧‧‧‧‧‧‧‧
Ⅰ. 序 論
A. 문제제기와 연구목적
한국에 개신교가 전파 된 이래 약 100년 동안 한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인도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큰 발전과 성장을 이루었다.
이것은 수많은 목회자의 충성된 사명에 충실한 결과이라고 사료된다.
지난 세월 한국의 기독교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은 목회자 누구든지 동감 할 것이다.
개인주의의 팽창, 신비주의로의 향진, 어려운 환경에 의한 무속주의 확대,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합리주의 및 세속주의의 확산 등 온갖 반 기독교적 사상으로부터의 도전을 받으며 걸어 왔고, 그로 인해 개혁주의 교회의 전통적인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러나 더욱 더 어려운 점은 사회의 주 5일제 근무의 확대 시행이다. 이로 인해 안식일의 의미가 퇴색되어가는 것이 앞으로의 목회자들이 헤쳐 나가야할 큰 사명으로 부상하였다. 이와 같은 현실의 문제점들은 교회 안팎으로 여러 가지 자성을 일으키고, 비판을 일으켰으며, 특히 목회자들의 자질과 자세가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목회자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새로운 목회 기술이 개발이나 방법의 모색 등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확립하여야 할 것이다.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찾기 위한 이번 연구는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 연구의 시도 자체로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있다고 본다.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목회자”라는 용어의 기원부터 살펴보아야 하겠다.
그렇지만 한국교회에서 목회자란 용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하지가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과정에서 출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1901년 한국에 최초의 신학교가 세워지고 1907년 최초의 졸업생 7명이 독노회의 안수로 목회자 사역이 시작된다. 당시 한국 사람들은 성서와 쪽 복음 전도지를 팔거나 배부하면서 그리스도의 진리를 전달하는 매서인, 내외 풍속이 엄격하던 시대적 상황에서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전도부인, 그리고 선교사들을 도와 교회를 책임지고 돌보던 조사 등이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 독 노회에서 최초로 목사가 세워졌고 이들과 더불어 교회를 중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목회자라고 불렀는데, 일제 말기인 1941년 한국 교회가 일본 기독교의 체제로 변질되어 목사라는 말을 교사로 바꾸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교회는 계속 목사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오늘날 교역자란 용어가 사용되기도 한다. 미래의 성공적인 목회 사역을 이루기 위함을 논문의 방향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B. 연구 방법과 범위
필자는 본 연구를 위해서
Ⅰ. 서론
A에서는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을 밝히고,
B에서는 연구 방법과 범위를 밝히고,
Ⅱ. 본론
A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의미에 대하여 고찰하고,
B에서는 목회자의 당면 과제를 살펴보고,
C에서는 목회자의 자기 성찰에 간하여 고찰하고,
D에서는 현대 및 미래의 바람직한 목회자상에 대하여 살펴보고,
E에서는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 방안을 고찰하고,
F에서는 미래의 성공적인 목회자상에 대하여 고찰한다.
Ⅲ. 결론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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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本 論
A.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의 의미
1. 구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
옛날 하나님 사자들은 여호와로부터 위임을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집어서 자신의 입에 갖다 댔으며, 이때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 것인가”라는 주의 음성이 들려 온 것으로 말한다. 이때 선지자 이사야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사 6:8).
그는 이처럼 주님께서 특별히 찾아와 그의 사명에 자격을 부여하신 다음에야 달려 나갔다.
“여화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내가 너를 복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 하나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는 말 할지니라 너는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여호와께서 그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여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렘 1:4-10).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 면에서 에스겔이 맡은 위임도 마찬가지였다.
에스겔 자신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인자야 일어서라 내가 네게 말하리라 하시며 말씀 하실 때에 그 신이 내게 임 하사 나를 일으켜 세우시기로 내가 그 말씀하시는 자의 소리를 들으니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내가 네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네 배에 넣으며 네 창자에 채우라 하시기에 내가 먹으니 그것이 내 입에서 달기가 꿀 같더라. 그가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에게 가서 내 말로 그들에게 고하라.”
다니엘의 부르심은 기록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에게 내린 여러 이상을 통하여 입증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개인적인 명상과 공적인 행동에서 주께로부터 받은 엄청난 호의도 그것을 입증한다. 즉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말은 “여호와의 말 이니라”는 말을 앞세우고 있다.
오늘날에는 제사장이라는 직분이 모든 성도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예언을 하는 것, 곧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아 복음 전파에 전념하는 것은 사실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해당하는 은사이자 부르심이다. 바로 이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선지자들처럼 자신이 맡은 직분의 정당성을 확신해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란 명칭은 구약의 목자라는 말에서 나왔다. 그리고 목자는 구약시대에서 가장 보편적인 직업이었다. 목자는 양이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으로서 은유적으로 볼 때 다스리는 사람, 즉 감독이라는 뜻이었다.
2. 신약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인간임을 이해했다. 루스드라에서 사람들이 그들에게 제사 지내려고 했다. 그러자 그들은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4-15)고 했다.
하지만 바울과 바나바는 같은 이해를 가진 평신도와 목회자가 너무나 적은 실정이었다. 많은 평신도들이 목회자(목사)라면 물위도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고후 1:1)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찌어다”(고전 4:1)라는 구절이 있다.
관리인이 자신이 직책을 주인으로부터 받아야 한다는 것쯤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관리인이 되고 싶다거나 남들이 그렇게 여긴다고 해서 관리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사람들에게 은사를 주셨는데, 이 은사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사람들을 가리킨다는 점이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목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엡 4:11).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렘 3:15)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렘 23:4)라는 말씀이 증거이다.
헬라어 “포이넴”은 목회자를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목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리차드 박스터는 목사를 “양 떼들의 영을 잘 아는 상담자”라고 하였고, 종교 개혁자 쯔빙글리에 의하면 목사는 목자와 같은 기능을 연상케 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역사속의 목회자
a. 초대 교회
초대 교회의 목회자는 사도 시대로부터 교부 시대에 걸쳐 살펴 볼 수 있다.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는 선포자로서, 예언자로서, 청지기로서, 종으로서 부각 되었다. 이러한 성서적인 목회자는 교회 안에서 역사적으로 변천해 나갔다.
초대교회 제자들은 사도로 불렸다.
이 말은 “보내심을 받은 자”, “대사”, “전령 자”, 그리고 “순회 전도자”인데 그들의 직무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자들이 목회자로 활동했던 신약시대 교회의 목회는 다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사도나 예언자같이 교회의 목회를 소명으로 받는 자들이 하는 직책이요, 둘째는 문화적 혹은 자선 사업을 위주로 하는 직책으로 집사의 직책이며, 셋째는 교훈적이고 행정적인 일을 맡은 감독의 직책이다.
그 후 신약 시대를 지나 2-3세기 말까지는 교회가 점차적으로 정돈되어져 가며 조직화되고 제도화 되었다.
이때 교회는 성례(성찬, 세례)를 강조하였으며 한 지역의 감독은 지방 교회에 있던 장로들에게 성례전을 거행할 권한을 주었다. 그 결과 지방 교회의 장로가 사제가 되었고, 감독 사제가 된 장로들을 합쳐서 사제단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해서 목사직은 카리스마적인 것이 아니라 일종의 직업적인 것이 되었고 감독이나 장로 중에는 세속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었다.
4세기에 이르러 교회가 로마제국에 공인 받고 기독교의 영향력이 점차로 강력해 짐에 따라 감독은 일반 문제에 대한 재판권도 갖게 되었으며, 황제의 고문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감독의 지위가 점점 강화되고 세속 사회에 대헤서도 권세를 갖게 되자 이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높아 갔다. 이러한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대 감독인 크리소스톰은 이상적인 감독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그는 위엄이 있는 동시에 겸손해야 하며, 무서운 면을 가지는 동시에 친절해야 하고, 어른다운 위품이 있어야 하며, 차별이 없는 동시에 예의가 있어야 하고, 겸허한 동시에 비굴해서는 안 되며, 열정적인 동시에 신사적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모든 위험성에 대항 할 수 있다. 그는 단 하나만의 목적만을 생각하여야 하는데, 그것은 교회를 개발하는 일이다. 또한 사제는 침착하고 분별력이 있어야 하며 모든 면을 볼 수 있는 천의 눈을 가져야한다”
암브로시우스는 감독의 위치를 강조하면서 감독은 제사장과 예언자로서 때로는 쓴 맛이 있고 딱딱하기도 해야 하며(렘 1:1), 제사장의 직분은 사도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받은 그것을 후세에게 전달해준 것이요, 예언자로서의 감동은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것인데 이 두 가지가 잘 결합 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감독이라고 했다.
또한 히포의 감독이요 대교부인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가 제시한 이러한 목사의 상을 더 발전시켜 감독과 교회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목회를 통해서 교회와 결합이 단절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결합된 것이며 교회를 버리지 말도록 결합되어 있다” 이는 양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목자로서의 목회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b. 중세 교회
5세기 초 민족 대 이동과 더불어 동쪽에서 침범해온 반달족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이 무너지게 되었고, 교회도 많이 변화하였다.
이것은 주로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고, 특히 6세기에 있었던 회교도들의 침입은 동로마 제국과 교회의 위축을 초래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고 수도원 생활을 강조함으로써 외부의 도움 없이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하였다.
이렇게 사회가 변천됨에 따라 감독의 직능도 변화하게 되어 전에는 금지되었던 장사를 성직자들도 할 수 있게 되어 후에는 성직자들이 거부가 되었다. 특히 어떤 수도원에서는 술과 털과 양곡을 필요 이상으로 생산하여 다 소비하지 못하자 수도원 밖으로 내다 팔아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또한, 전쟁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했지만, 수차에 걸친 십자군 운동에 신자와 성직자들이 직접 참여 하였다. 한편, 지방에 있는 목회자들도 그 사회에 있어서 지배자의 모습을 뚜렷이 나타내었다.
중세기에는 복음이 예수의 수난 사건과 부활 사건을 중심으로 한 수난을 중요시 하였다.
이 시기에도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강조하는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목회자를 위한 지시서”(1450년)에 보면 교직자는 효과 있는 좋은 설교를 하기 위해서 깨끗한 생활을 해야 함을 가르치고 있는데, 즉 술집에는 가지도 말고 씨름이나 수렴도 하지 말며 사치한 옷도 입지 말라는 것 등이다. 고기와 술은 각자의 경제 상태에 따라서 하되 성경읽기를 열심히 하라고 하였다. 특히 프란시스 교단에서는 설교에 중점을 두고 대 집회도 많이 가졌으며, 설교는 교직자의 필수적인 직무의 하나로 간주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세기의 목회자상은 선포 자나 섬기는 자 보다는 군림하고 지배하는 목회자의 모습이 강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중세에는 성직자의 계급이 군림하고 지배하는 위치에서 정치와 행정, 그리고 개인의 정신적 문제 까지도 지배하였다.
교황권은 교회의 머리로서 국가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c. 종교 개혁기
종교 개혁 시대의 주된 목회자 이미지는 설교자와 목사이다.
사제라는 용어는 죽은 은유가 되어 철저하게 밀려났다.
빌헬름 퍽은 이 용어의 복잡한 전개 과정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종교 개혁가들은 습관적으로 목회자들을 목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설교자라고 부를 때가 더 많았다. 목사라는 용어는 경건주의, 특히 루터 교회의 경건주의의 영향 하에 있던 18세기에만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을 뿐이다. 독일의 개혁가들 역시 설교자들을 목사라고 불렀다. 일반인들은 보통 사역자들을 설교자라고 불렀으나 그들 역시 로마가톨릭 시대에 익숙해진 사제 등의 용어들을 계속 사용하였다.”
중세기 로마 가톨릭 교회는 교황권의 강화를 통해서 국가위에 군림하고 미사와 고해제도를 통해서 신자들을 지배했다. 뿐만 아니라 예배 의식에 치우쳐 설교를 제한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설교에 활기를 띠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복음은 스콜라 철학의 영향으로 본래의 모습을 잃었고 성경에 이교 철학이나 지식이 추가 되었으며 여러 교회 전승이 덧붙여져서 복음이 완전히 깨뜨려진 듯 했다. 이러한 까닭으로 종교 개혁자들은 복음의 재발견과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종교개혁이 몰고 온 파격적이고 새로운 이미지는 제단 뒤에 있는 사제가 아닌, 손에 성경을 들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단 뒤의 설교자였다.
설교가 성례전을 밀어내고 기독교 예배의 핵심에 자리 잡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셨고 초대교회 사도들과 전도자들도 설교를 했다는 사실이 강조 되었고, 사역자는 우선적으로 복음의 전령이 되어야 했다.
루터는 설교를 성령의 직무라고 했으며, 설교자는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의 사신이고 천사이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제라고 했다.
그러므로 말씀의 종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 계신 음성의 대변자로 위탁 받은 것이다.
또한 루터가 제시한 근본적인 개혁의 하나는 만인제사장설이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의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여 하심이라”는 말씀에 의거하여 루터는 신약 성경의 핵심적인 이해를 바로 잡았다.
그는 만인제사장설을 통해 모든 신자들은 그들이 갖고 있는 신앙에 의하여 종이요 제자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신자가 다 설교하고 가르치고 제사장이 되라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가지는 사명을 효과적으로 성취하고 또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한 사람이 택함을 받아 설교자의 직책을 맡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신자인 한 우리는 다 제사장이다. 그러나 제사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 가운데서 뽑혀서 우리의 이름으로 행동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봉사자이다. 그들의 제사 직은 우리의 것이다”
루터는 설교자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곧 설교라고 선언하였다. “설교하는 자의 직무는 성령의 직무이다”.
“설교하고 세례를 주는 등의 일은 인간이 수행하지만, 실제로 설교하시고 가르치시는 이는 성령”이라고 하였다.
목회자의 교회 역사 속에 나타난 이미지를 정리해 보면,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시대이며, 사도의 전통을 이어받은 목자와 감독자로서의 목회자상이 형성 된 것을 알 수 있다.
중세는 로마 카톨릭이 지배하던 시대로 성직자 계급이 군림하고 지배하는 위치에서 정치와 행정, 정신적인 문제 까지도 지배하였다.
특히 교황은 교회의 머리로서 국가에 대한 간접적인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16세기 종교 개혁기를 거치면서 17세기에는 정통주의 시대가 열렸고, 18세기에는 영적 각성의 시대를 거친다.
종교개혁 이후의 목회자는 설교자로 등장한다.
목사는 복음 전파를 위해 힘썼으며, 설교와 성경 강해를 주로 하였고 성례전을 집행 하였다.
종교 개혁 이후, 18세기의 영적 각성 운동과 19세기의 유럽의 세속화 신학, 독일의 자유주의적 개신교신학이 나오는데, 특히 19세기는 선교 역사상 위대한 시기로 기록될만하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를 통해 생동하는 경건한 신앙 운동과 유능한 목회자들이 배출되었다.
그 후 20세기에 들어 개신교는 복음주의 운동과 에큐메니컬 운동으로 크게 나누어졌다. 20세기 현대 교회는 목회 신학을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자질을 갖춘 목회자들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목회 신학의 발달로 신앙 상담과 영성 치유를 통한 목회상담자가 전문적인 임상 목회를 하게 되었다.
21세기 한국교회는 이러한 역사상 사명을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서 사도들에 의해 하나님의 교회가 불일 듯 일어난 초대교회처럼 21세기에도 그러한 성령의 역사가 계속되어 질것이다.
B. 목회자로서의 당면 과제
1. 목회자의 자질과 자세
목회자는 자신의 개인적인 성격이 모든 면에서 자신의 목소리와 부합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설교는 잘하면서도 생활은 엉망인 목회자가 있었다.
그 목회자가 강대상에 올라 갈 때마다 사람들이 그가 다시는 저기서 내려오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그리고 그 목회자가 강대상에 내려올 때마다 그가 다시는 적에 올라가지 말아야 할 텐데 하고 생각했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화의 한편이다. 목회자는 이런 야누스적인 목회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단에서는 거룩한 하나님의 제사장이지만 세상에 나서면 악마의 아들 노릇을 하는 일이 결코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바질(Basil)에 대한 나지안주스(Nazianzen)의 말처럼 “우리 자신의 가르침에서는 천둥을, 대화에서는 번개를 치게 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두 얼굴의 사람이나 언행이 일치 하지 않는 사람은 신뢰하지 않는다. 속담에 따르면, 말보다는 행동이 더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목회자의 말이 제아무리 멋있어도 그의 생활이 엉망이면, 그의 말은 효력을 잃고 말 것이다.
결국 우리의 참된 건축물은 우리 자신의 손으로 지을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말 보다는 우리의 인격과 행동이 훨씬 더 설득력을 가진다. 현대의 목회자들 중에는 강대상에서 내려온 다음에는 하나님 섬기는 일을 까마득히 잊어버리는 목회자들도 있다고 듣고 있다.
이런 목회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일거리에 묶여 있을 뿐이다. 이런 목회자는 목회 절차상의 시간에 휩싸여 일시적으로 설교 할 때만 목회자 일뿐, 강대상만 내려오면 언제 그랬느냐는 식이다.
참된 목회자는 언제나 목회자로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목회자는 일관성 있게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우리 하나님은 모세를 끔찍이 위하셨다. 그리하여 모세는 하는 일과 말에서 큰 권능을 보인 선지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람은 모름지기 다음과 같은 점에서 주님을 닮아야 한다. 곧 자신이 내 뱉은 말과 자신이 드러내는 행동에 모두 똑 같은 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하나님을 기준한 모든 면에서 최상의 힘을 발휘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교회 역사가 사도행전 뿐 임을 알 수 있다.
성령님은 사도들의 설교 집을 남겨 주지 않으셨다. 아마 그들의 설교는 우리가 흉내 낼 수도 없을 만큼 훌륭한 것이었지만, 성령님은 그들의 행동에 관한 기록만 보관해 두셨다.
우리에게는 사도들의 결의안도 전혀 없다. 현재는 교회 회의를 열 때마다 토의 사항과 결의안을 기록으로 남겨두지만, 성령님은 오로지 행동만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다. 이왕 남겨 주실 것이라면 행하여야 할 행동 말고도 다른 여러 가지 남겨 주시지 왜 행동만 남겨 주셨는가를 우리는 심각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행동은 하나님의 눈을 더욱 가깝게 의식하면서, 모든 것이 드러날 그 큰 날의 빛 가운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목회자는 덕을 끼치는 자질과 가르칠 만한 소양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목회자적 성격을 완성하는 다른 자질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건전한 판단과 확고한 체험을 통하여 당신들이 배워야 하며, 굳은 의지와 용기가 두드러지게 드러나야 하고, 세심함과 동정심이 있어야 한다. 잘 다스리는 행정의 은사도, 잘 가르치는 교육의 은사만큼 필수적이다.
남보다 앞장서서 인도할 자격이 있어야 하며, 인내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불굴의 용기를 발휘 할 수 있어야 한다. 신앙적인 면이나, 은혜 면에서도 남들보다도 위에 있어서 그들의 인도자와 상담자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한다.
디모데전서 3장 2-7절, 디도서 1장 6-9절에 기록된 자질과 은사가 없고 넘치지 않는다면 복음의 전도자로서는 성공할지라도 목회자로서는 부적절 할 것이다.
목회자로 구별되는 사람으로서 그를 도구로 삼아 예수를 알게 되는 사람들이 생기지 않을 때에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으로 간주 될 수 있다. 목회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이 성공하든 못하든 계속 일할 수밖에 없지만 결과가 드러나기 전에는 자신의 소명을 확인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설교를 듣고 회개 했다는 사람들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목회자는 일반적으로 자신은 외롭고 고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목회자 자신을 돌 봐줄 사람이 하나님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당신은 뛰어난 사람이어야 한다. 곧 유행을 쫓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을 닮을 경우 사람들은 당신을 본받으려 애 쓸 것이다.
그러나 당신의 덕의 문전에만 어른거릴 뿐, 다른 말로해서 겨우 죄를 물리치는 일에만 급급할 뿐이라면 당신은 두려움에 마지 못하는 사람들만을 그리스도의 울타리로 이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스러운 일은 실천에 옮기는 것을 당신의 지표로 삼으라. 남들이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노예 살이 일뿐 자녀로서의 애정에서 우러나온 행동이 아니다.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면, 당신이 사람들에게 아버지 노릇을 할 수 없다. 침침한 등불의 경우 한쪽에는 희미하게나마 빛이 비칠지 모르지만, 밝기라는 측면에서 한 사람은커녕 많은 사람의 길을 비추거나 수많은 추종자를 이끌지는 못 할 것이다.
율법에서는 조금이라도 흠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주님께 예물을 바칠 수 없었다(레 21:17-20). 다시 말해서 주님께서는 이것으로서 자신의 일꾼들이 갖추어야 할 자질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제사장은 자신의 제복에 금방울과 석류를 달고 다녀야 했는데, 하나는 건전한 가르침을 상징하고 다른 하나는 열매가 풍성한 삶을 상징한다(출 28:33-34).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모든 사람을 통하여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사 52:11). 제사장들에게 죄가 있으면 백성들이 여호와께 예물 드리기를 꺼려하게 된다(삼상 2:17).
제사장들이 생활이 악하면 그들의 가르침이 수치를 당하기 마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신앙 고백으로서는 선언하고 행위로서는 나쁘게 권면한다고 어거스틴은 말한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가르침으로는 세우고 그들의 생활로는 파괴 한다.
목회자의 개인적인 일 때문에 당신의 가르침이 망신당하는 일이 없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 당신의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서, 남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도 정작 당신 자신은 왜 하지 않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이다. 자신은 실컷 배를 채우고는 남들더러 금식하라고 설득한다면 곤란하다. 하긴 도둑도 탐심은 꾸짖는 법이다.
그리스도의 일꾼은 마땅히 자신의 혀와 마음과 손이 하나로 일치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는 확신이 있어야 하는데, 이 사명 감당하기 위 하여는 다음과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
첫째, 성령 충만해야 한다. 목회사역은 영적인 일이기에 인간의 힘으로는 할 수 없다. 성령의 역사 없이는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일이다.
구약의 성막을 건축한 제작자 브살렐과 오흘리압도 성령 충만을 받아(출 31:2-6) 일했으며, 예루살렘 교회의 일꾼을 뽑을 때에도 성령 충만이 조건이었다. 성령 충만은 “개인적인 삶, 교회, 세상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순종하며 섬기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부여받는 것이고, 모든 기독교인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며,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정의와 사랑의 도구가 된다.”
따라서 목회자에게 성령 충만은 절대적이며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영성 훈련, 말씀 묵상, 기도하는 생활을 쉬지 말아야 한다.
둘째, 목회자에게 비전이 있어야 한다.
비전이란 미래에 대한 환상이나 야망이 아니라 소망을 가지고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는 자기 인생의 분명한 청사진이다. 교회는 비전 공동체이다. 비전 있는 목회자라야 비전 있는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네덜란드 사회학자인 폴락은 “미래의 이미지”라는 책에서 문명을 성공시키는 일차적 요인은 사람들이 미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집단적 비전” 즉 공동체적 비전이라고 말한바 있다.
비전은 눈앞의 현실 너머를 볼 수 있는 능력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하고 발명하는 능력이며, 아직은 이루지 못한 존재로 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비전은 목표를 분명히 해주고, 방향을 설정하고, 주어진 자원의 한계를 넘어서 사명을 완수하게 된다. 비전을 가진 자는 첫째로 사람의 성패를 좌우하는 집중력을 가지게 된다.
비전은 외부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솔선해서 움직인다.
비전은 사람들에게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불굴의 의지를 주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비전은 자기 평가 능력이 개발된다.
비전은 그물 모양으로 얽힌 복잡한 인생살이를 단순화 할 수 있게 된다.
비전은 오늘에서 미래를 볼뿐 아니라 미래의 시점에서 오늘을 보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을 현실로 변화 시킬 행동 목표와 프로그램의 순위가 정해지고 신실하게 실천 되지 않는 한, 비전은 한낱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따라서 목회자가 성공적인 목회를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사역에 대한 위대한 비전을 가지고 구체적이고 측정 할 수 있고, 달성할 수 있고, 실현 가능하고, 명확한 목표를 설정하여 실천하여야 한다.
셋째, 목회자에게는 자시 희생적인 사랑이 있어야 한다.
희생이 무조건 포기하는 것만은 아니지만, 원하는 것을 포기 하는 것, 권리의 침해를 허용 하는 것, 더 큰 가치를 위해 작은 가치를 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은 참된 지도자를 가늠하는 최고의 척도이다. 만약 목회자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자만심이 강하고 자신의 욕망을 달성하기에만 급급하다면 양 무리들을 바른 길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자기의 시간, 돈, 능력, 자식, 생명까지도 성도를 위해 희생 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다”(요 15:13)고 말씀하셨다.
이처럼 희생적인 사랑은 생명을 살리고, 영혼을 살린다.
하지만 오늘날 젊은 신세대 목회자들은 성경적 지식은 풍부한데 반해 이러한 자기희생적인 사랑이 부족한 경향이 뚜렷하다.
넷째, 목회자는 인격적이어야 한다.
목회자는 모든 사람들에게 인격적으로 본이 되고 말과 행동에서 윤리적으로 모범이 될 때 성도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며 성도들을 움직일 수 있다.
빌립보서에 나타난 인격적인 내용을 구비해야 한다.
그 내용은 ① 무엇에든지 참되어야 한다. ②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한다. ③ 무엇에든지 옳아야 한다. ④ 무엇에든지 정결해야 한다. ⑤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해야 한다. ⑥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해야 한다.
다섯째, 목회자는 마음이 넓고 부지런해야 한다. 목회자의 마음은 바다와 같이 넓어야 한다. 그래야 성도들의 고통과 모든 복잡한 문제들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목회자가 혈기를 부리고 다투면 목회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목회자에게는 수용성, 이해성, 참을성, 양보와 관용이 있어야 한다. 또한 게으름은 목회의 적이다.
열심을 품고, 살든지 죽든지(빌 1:20)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위해 미치는 (고후 5:13)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은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롬 12:8) 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섯째, 목회자 스스로 성장해야 한다.
목회자는 끊임없이 성장해야 한다. 목회자 개인이 성장한 만큼 교회도 성장하고 성도들도 성장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영적, 양적, 질적 성장은 목회자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신학적으로, 영적으로 발전하여 실력 있는 권위를 가져야 한다.
성경은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딤전 4:12),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딤전 4:15)고 했으며,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고 하였다.
지금은 학문과 영성을 겸비한 목회자가 필요한 시대이다.
일곱째, 목회자는 이미지를 잘 관리해야 한다.
목회자는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건강과 시간, 물질과 이성, 은사와 영성 등 인격 관리를 잘해야 한다. 더 나아가 목회자로서 이미지를 잘 관리하기 위해 외모와 품위도 잘 유지해야 한다.
즉 처신을 잘 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파송 받은 전권 대사이다. 그러므로 집무실이나 강단에서나 심방을 할 때 복장과 몸가짐에 항상 유의해야 한다.
어색한 몸짓이나 어색한 얼굴 표정은 혐오감을 주므로 삼가야 한다. 이렇게 할 때 목회자의 말은 더욱 큰 호소력을 지니게 될 것이며, 목회자로서 품위와 이미지를 유지 할 수 있다.
현 시대는 이미지 시대이다. 그러므로 외모에서 풍겨 나오는 그 사람의 품위나 몸짓도 매우 중요함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현대 목회자는 사역의 전문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수적이지만, 그 이전에 소명 받은 자로서 “자애롭고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목회자”라야 한다. 이러한 목회자상을 가지고 전문성을 발휘할 때 비로소 그 전문성을 소명으로 알고 실천하려는 성직자의 이미지가 부각된다.
2. 목회자의 성결
성결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필수 조건이자 가장 훌륭한 장식품이다.
단순히 도덕적으로 훌륭한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 보다 한 층 더 높은 덕이 있어야 한다. 곧 한결같은 성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거룩하게 하는 신성한 기름이 부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 향기로운 존재가 되게 해주는 그 무엇이 없을 것이다.
존 스타우튼은 “설교자의 위엄과 임무”라는 글에서 목회자의 성결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웃사는 하나님의 궤가 넘어지려는 것을 막으려고 손을 댔는데도 하나님의 궤에 손을 댔기 때문에 죽었다. 궤 속을 들여 다 보았기 때문에 벳세메스 사람들은 죽었다. 동물들은 거룩한 산에 가까이 가기만 하여도 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허물없이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천사들처럼”, 주의 앞에 나설 “사람들”, 주의 얼굴을 계속 쳐다 볼 “사람들”, 어깨에 궤를 멜 “사람들”, 한 마디로 말해 주의 대사가 될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어야 하는가? “여호와여 당신 집에는 거룩함이 합당 하나이다”
그러나 성전 기물과 복장 곧 다른 모든 것이 거룩한데도 오직 여호와께 몸 바친 성직자만 거룩하지 못하다면?
스가랴서에 따르면 말방울에 까지 거룩이라는 말이 새겨야 하는데도 성도들의 방울, 특히 아론 자손의 방울이 더러운 채로 남아 있다.
어딘가 아이러니컬하지 않은가? 이런 거룩이 없을 경우 하나님의 대사인 목회자는 자신이 대표하는 하늘나라와 하나님께 욕을 끼칠 뿐이다.
목회자의 성결은 죄인들에게 회개를 요청하는 크나큰 외침인데, 이 외침에는 거룩한 기쁨이 더해질 경우 놀라울 정도의 매력이 드러난다.
3. 목회자의 사명
목회자의 일이 세상에서 필수적인 것이기에 목회자는 최상급의 경건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직무와 수고는 목회자의 새로워진 본성의 활력에 비례하여 성과가 드러난다. 목회자 자신이 건전해야 일이 잘 풀리기 마련이다.
일한 것으로서 일하는 사람을 알 수 있다. 목회자의 사명은 진리의 원수들에 대적 하는 일, 믿음의 요새들을 방어 하는 일, 하나님의 집을 잘 다스리는 일, 슬피 우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일, 성도들에게 덕을 보이는 일, 길 잃은 자를 인도하는 일, 고집쟁이들을 참고 선한 길로 인도 하는 일,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일, 말씀으로 양육하는 일 등 수많은 사명들이 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강하신 분이신 하나님에게서 힘을, 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고, 다시 말하면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구하여야 한다.
목회자는 언제나 기도해야 한다. 생활 자체가 기도의 생활이 되어야 한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명령을 실천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바로 목회자인 것이다. 기도는 하나의 정신적인 훈련이자 높은 차원에서의 영적인 전투이다. 기도라는 정신적인 훈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마음 앞의 여러 가지 주제 가운데서 하나의 제목을 잡는다.
기도라는 영적인 전투를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속눈을 깨끗이 청소해서 하나님의 빛의 진리를 읽는다.
가장 훌륭하고 거룩한 사람들도 기도는 언제나 설교단 준비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 삼았다.
맥셰인에 대한 이런 이야기 있다.
“그는 주일마다 뭔가 값진 것을 교우들에게 주고 싶어 안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절박한 이유가 아니고서는 결코 사전에 명상과 기도의 시간을 충분히 갖지 않은 채 교우들 앞에 나서지 않는다.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원칙은, 이 문제를 두고 얘기를 주고받을 때 우리에게 한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그는 설교 준비를 어느 정도로 부지런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받고서, 출애굽기 27장 20절의 감람으로 찧어 낸 순결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라는 말을 들려주었다.
그렇지만 그의 기도로 넘치는 생활은 더욱 더 위대하다. 진실로 그는 회중들 앞에 나서기 전에 하나님과 갖는 교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목욕할 필요를 느끼던 그였다. 먼저 자신의 영혼을 성별 하는 것, 곧 자신의 영혼의 건강처럼 자기 목회의 활력과 능력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도 없다는 데에 그의 목회 방침이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을 시작하던지 간에 영혼의 준비를 먼저 갖추었다.
그의 부르짖음 뿐 만아니라 그의 기도 생활과 눈물은 그의 골방 벽이 증거 한다.
자신의 사역에 대하여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는 목회자는 허황되고 교만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 목회자는 자기 혼자만으로 충분하다고 행각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호소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성령께서 도우시지 않아도 자신의 설교만으로도 사람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 올수 있다는 생각을 품는 교만처럼 터무니없다.
우리가 참으로 겸손한 마음의 목회자라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모든 능력을 입혀 주시면서 “이 힘을 의지하고 가라”고 말씀 하시기전에는 감히 싸움터로 내려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는 목회자는 자신의 목회에 대해서도 아주 소홀 할 수밖에 없다. 그러한 목회자는 자신의 소명이 무엇인지 이해 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한 영혼의 가치를 헤아리거나 영원의 의미를 파악할 리 만무하다. 그는 단지 목회 직에 날아 들어오는 빵 조각이 필요하기 때문에 설교단에 유혹을 느낀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칭찬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사람들의 칭찬에만 급급한 가증스러운 위선자일 것이다.
설교자라는 이름만 가지고 살아 갈 뿐 사실은 죽은 존재 일뿐이다. 그는 잠언서의 절름발이처럼 다리가 서로 맞지 않아 평생토록 절뚝거리며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기도보다는 설교에 더 많이 치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목회자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
즉 교회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양떼를 먹이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일을 한다. 비록 목회자는 지극히 약하고 무능한 존재라 할지라도 그의 사명은 진리와 구원과 능력의 생명체인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자이다.
4. 목회자의 소명
첫째,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복음을 전파할 권리가 있다.
문제는 그에게 그럴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복음 전파는 그리스도인의 권리 일뿐 아니라 절대적인 임무이기도 하다 (계 22:17). 복음 전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일부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일이다.
성령께서 맡겨주신 은혜의 분량대로 각 사람은 교회 그리고 불신자들 속에서 평생 이 일을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남자들만이 아니라 여자들에게까지 해당되는 사항이다. 남자든 여자든 신령한 은혜를 받았으면 , 모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널리 전하는데 최선을 다 기울여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의 봉사가 반드시 설교여야 할 필요는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특별히 공적으로 가르치는 일에서 엄연히 제한 받고 있는 여성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딤전 2:12, 고전 14:34).
진지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만 하다면, 각자의 목회소명을 점검 할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으리라 생각되어 진다. 무엇보다도 이 점에 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자신을 점검하기 전에는 목회 직에 뛰어 들지 않는 것이 중요한다.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을 경우, 목회 직에 대한 소명과 관련된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자기 자신의 구원에 대한 확신이 필요한 것처럼, 목회자에게는 목회 소명에 관한 확신이 필수적이다.
회심을 경험하지 않은 채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은 소명 없는 목회자와 다를 바 없다. 모두 다 명목뿐인 존재일 따름이다.
하늘의 부르심의 첫 징조는 그 일에 완전히 빨려 들어가려는 욕망이다.
목회 소명이 참된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영혼을 생각하셔서 이루어 주신 일을 남들에게 말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어 미칠 정도로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야 할 것이다.
어느 목회자가 상담하러 온 사람에게 “할 수만 있다면 목회 직에 들어서지 말라”고 충고 했다. 참으로 뜻 깊고 어진 충고이었다.
현재 자기 직업이나 일에 만족하고 있다면 그 일을 계속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하게 거하지 아니 하신다.
하나님의 영이 충만한 사람이란, 그 사람의 속 영혼이 갈망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일에도 싫증을 느끼고 마는 사람이다.
한국의 속담에 평양 감사도 자기하기 싫으면 안한다는 말이 있다.
금 은 보화를 다 준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아니고서는 그 어떤 직업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면, 복음 전파에 매 달리는 것이 옳다. 복음을 전파하지 않고서는 무서운 화가 미치고야 말리라는 느낌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생명같이 느끼지 않는데도 목회 직을 받아 들인다면 이로 인해 불행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르는 자기 부정을 감당하지 못 할 것이다.
자기 직분에 생명을 걸지 않는 사람은 곧 쓰러지고 만다.
애착의 힘, 이것은 고달픔을 이겨내게 하는 위로이다. 이 힘이 없었더라면 우리 가슴은 벌써 터져 버렸을 것이다. 이 애착심이라는 허리띠를 동여매라. 그러면 담대함을 얻을 것이다. 저항 할 수 없는 소명이라면 비참하게도 인생은 허송세월로 끝나고 말 것이다.
목회자에로의 욕망은 매우 신중한 것이어야 한다.
깊은 생각이 없는 갑작스러운 충동이서는 결코 안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인생의 괴로움을 피해 도피하는 방법으로 목회자나 되어 볼까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진정한 목회자로서의 욕망은 우리의 마음이 최상의 상태에 있을 때 저절로 생겨난 결과이자 경건하게 열망한 대상 그리고 가장 간절한 기도의 주제이다. 재물과 세상 안락이라는 유혹이 제아무리 끈질기게 밀려와도 이 욕망은 여전히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 대가를 철저하게 계산한 다음에도 여전히 맑은 정신에 침착하게 남는 것이어야 한다.
진지한 욕망에는 조금이라도 인간적인 사심이 없어야 할 것이다.
자신을 가장 진지한 방법으로 반성한 다음에 자신이 목회자라는 직분을 찾는데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의 유익 이외의 다른 동기가 하나라도 발견 된다면 당장 목회자 직을 포기하는 것이 좋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성전에 사고파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을 가장 꺼려하시기 때문이다. 목회자를 향한 욕망은 지속적인 것이어야 한다.
곧 시련 기간의 테스트를 이겨 내는 열정, 아무리 발버둥 쳐도 빠져 나 갈수 없는 간절한 마음, 해가 바뀔수록 더욱 강렬해지는 욕망, 그러다가 마침내는 말씀을 선포하고픈 열망, 수척함과 배고픔이 되는 욕망이어야 한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진지한 욕망과 함께 가르칠만한 소양과 그 밖에 여러 사람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필요한 다른 자질이 어느 정도 갖추어 있어야 한다. 자신의 목회자로에의 소명이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지를 입증하려는 사람은 이러한 면에서 테스트를 잘 하여야 한다.
물론 이것은 설교 초보자가 유명한 오랜 경험의 목회자처럼 잘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복음의 전파자는 소명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의 구변을 갖추어야 하며, 이것을 가꾸면서 증대시킬 수 있다. 구변의 은사가 처음부터 조금도 없다면 거기서는 더 이상 자라날 것이 없다.
목회자들에 대한 주님의 뜻은 교회의 기도에 찬 판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 진다. 목회자의 설교가 하나님의 백성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말로 소명에 대한 증거이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으로 말할 수 있는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대개 말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사역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자격을 갖추면, 결코 설교 할 곳이 없어 고민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이곳저곳에 명함을 돌리면서 설교하게 해 달라고 조르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능력이다. 아니, 기회와 능력보다 더 진지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걸음이다. 양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목자를 알아 볼 것이며, 문지기는 당신에게 문을 열어 줄 것이고 양떼는 음성을 알아듣는다.
우리는 목회자로서의 올바른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저 생각되는 데로 신학을 공부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닐 것이다.
목회자 직에 종사하고 싶다는 열렬하고 진지한 욕망과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 받아 목회자 직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세상의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고 능히 감당 할 수 있다. 결코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은 없다.
복음을 전하고 싶은 욕망이 깊은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장 겸손한 자세로 있을 때 우러 나온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여야 한다.
목회자의 자질은 잘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을 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도 전에 성급하게 뛰어드는 사람은 절망뿐 일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부르심은 준비 과정을 통하여 준비가 완료되면 길이 열리고 차츰 목회할 수 있는 상황으로 인도 되어 가며, 장소와 방법과 시간이 지적된다. 실제로 목회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둘째, 토마스 옥덴의 “목회신학”을 번역한 오 성춘 교수는 역자 서문에서 목회에는 두 가지 부름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부르심(소명), 사람들의 부름(사명)이 교차하는 곳에 서 그 동기를 부여받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목회의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는데, 목회자 자신의 부름, 자존심, 이상, 성장의 욕구, 목회자 자신의 인간적인 열정 등에 응답하는 목회는 허무에 종속되어 곧 사라 질 수도 있다”
또한 옥덴은 목회를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으로 구분하면서 “내적 소명이 자기 검토라면, 외적 소명은 신앙 공동체의 확증”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자기 검토로서 내적 소명을 두 가지로 점검해 보면,
① 자신의 내적 소명을 살핀 다음 다른 사람들과 사역을 위해 자신의 잠재적 은사들을 검토해 보는 것이다.
목회자는 자신이 소명을 받았다는 의식이 지속적인지 또는 지속적이지 않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우리의 답변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목사의 길을 가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있는 단독자로서 심령의 밑바닥부터 자기 검토의 방향과 내용을 책임 있게 시험해 보아야 할 것이다.
② 만일 일차적 소명이 긍정적으로 입증 된다면 내적 소명이 교회에 의해 외적인 확증을 받을 수 있는지 더욱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
옥덴은 외적 소명을 교회의 지도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약 시대 이래로 남용하기 쉬운 목회 지도력을 바르게 행사하도록, 교회는 일정한 절차, 법적인 장치, 합당한 기구와 특별 위원회를 설치하여 목사 후보생의 자격을 합당하게 평가하고 공적으로 승인하는 일을 담당해 왔다. 교회는 하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 속에 존재하면서 하나님의 계시에 바르게 응답하려고 노력한다. 이때 이러한 모든 것이 필수적이다”
5. 목회자의 설교
요한복음 21장에는 스승을 잃고 실의에 빠져 어부의 생활로 되돌아가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수제자 베드로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홀연히 나타나셔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후 너는 이제부터 “내 양을 먹이라”라며 세 번씩이나 반복하여 명령하셨다.
처음에 베드로를 부르실 때는 갈릴리 해변에서였고, 그때 말씀은 “너는 나를 따라 오너라 그리하면 너로 하여금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선교의 사명을 주셨으나 디베랴 해변에서 베드로를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째 사명으로 목양을 주셨다.
이 목양의 사명을 주시면서 말씀 하신 것의 내용을 실천 신학적으로 설명한다면 “내 양을 먹이라”는 것은 설교를 의미하고 “내 양을 치라”는 것은 행정을 의미하며, “내 양을 먹이라”고 하신 것은 교육을 의미한다고 생각 할 수 있다.
목회자의 직분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위탁 받은 양떼를 먹이고 인도하고 다스리는 일이다.
이세가지 과제는 모두 중요하지만, 그 중에서 목회 사역에서 우선순위에 놓여할 과제는 양을 먹이는 일, 즉 영의 양식을 공급하는 설교이다.
목회자는 모든 일에 우선하여 권위 있는 말씀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서 양들에게 생명의 양식을 먹인다. 그리고 생명의 양식을 받은 신도들을 통해 삶의 현장에서 이웃에게 전달됨으로 선교의 열매를 맺는다. 그러므로 설교는 죄인을 구원하는 유일의 수단이며, 모든 설교는 이 목적을 지향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데 있어서 신약 성경의 근본정신은 말씀과 성례전이다. 계시의 말씀과 성례전은 따로 구분해서 생각 할 수도 없고 실천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교회사를 보면 가톨릭교회는 성례전을 절대시 하는 미사로서의 예배가 주류를 이루어 심미적인 의식에 호소하게 되었고 개신교에서는 계시의 말씀을 절대시하는 설교로서의 예배가 주류를 이루어 마음과 지성에 호소하는 경향으로 기울여 졌다.
그러나 다행한 것은 근년에 와서 양쪽은 모두 예배의 갱신을 통해 각각 부족함을 보완하려는 시도는 신약성경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려는 바람직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설교자는 천국 사명을 받고 파송된 존재이다.
그는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겔 2:5, 7. 3:11)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은사로 공인 되었다.
노아는 “의의 전파자”(벧후 2:5)로서 그의 증언에 의해 홍수 이전의 세상은 정죄되었다(히 11:7).
시편 기자 및 예언자들은 변론, 교훈, 예언, 주님의 약속 등이 형식으로 진리의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예언자들은 당대의 설교자들이었으며 신약 복음의 전파자의 선구자 들이었다.
사도행전 15장 21절에, 예루살렘 목사인 동시에 예루살렘 공의회의 대회 주재 간사였던 야고보는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고 발언 하였다.
유대주의는 언제나 그 설교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신약 교회는 “평강의복을 전파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롬 10:15) 자들의 발을 따라 움직인다.
바울이 언급한 이 구원의 전파(설교)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집약되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회개, 믿음, 주 예수 앞에서의 복종을 촉구하는 일이다. 그것은 소망의 복음을 불신 세계에 전파하기 위해, 그리고 살아 계신 우리 주님에게서 피난처를 구한 자들의 믿음을 굳세게 다지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정해주신 방편이다.
사도 적 메시지(케리그마), 즉 최초로 주님의 지상 명령을 들었던 사람들의 설교는 다음의 일곱 가지 특징을 지닌다.
① 그 메시지는 명백한 사실의 집합이었다. 즉 그것은 “전체적 진리”이었다.
② 그 메시지는 사변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듣고, 살펴 받아들이는 자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인간 역사에의 개입을 전언한 것(또는 전달한 것)이었다.
③ 그 메시지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 그의 십자가와 대속, 영광스런 부활 등으로 집약 된다.
④ 그 메시지는 성령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속에 증거 되고 확증되었다.
⑤ 그 메시지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유기적으로 구약과의 관련성을 지닌다(그것은 유대주의의 뿌리와 줄기에서 피어난 꽃과 열매였다).
⑥ 그 메시지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윤리적 요구를 부과하였다.
⑦ 그 메시지는 방대한 종말론의 체계였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에 찬 영원을 전망한다.
하나님의 경륜에 따르면, 설교자 없이 영광스러운 진리의 메시지전파가 이루어지는 일은 전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의 선택 목적에 비추어 볼 때 그의 뜻과 일은 살아 있는 인격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기 마련이다. 이것이 바로 설교의 요체이며, 목회자의 첫째이자 으뜸가는 외침의 내용이다.
필립스 브룩스는 1877년 그의 저서 <예일 설교학 강좌>에서 이렇게 기록하였다.
“설교는 한 사람에 의해 많은 사람에게 전해지는 진리의 전달이다. 가장 참된 진리는 사람이 사람에게 형제의 인격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으로서, 결코 선포된 진리 자체가 아니다”
설교는 한 인간의 음성, 생활, 심정, 이성, 등 그의 전 존재를 통해 소개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스펄전이 단상이 아닌 난간에서 설교 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한 인간은 자신의 온 몸으로 설교 하는 것이며, 따라서 그 모습을 감추면 안 된다고 그는 말하였다. 앞으로 다가오는 모든 세대, 모든 교회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진리는 설교자에 의해 되 새겨 지고 재천명되고, 재 화육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또 다시 새로운 생명을 부여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목사 - 목회자 - 설교자의 소명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 하시기를 기뻐 하셨도다.”(고전 1:21).
하늘 아래 복음을 선포하는 일보다 더 보람 있고 이 보다 더 절실하게 필요한, 그리고 하나님이 축복하신 사역은 없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설교이다. 또한 그리스도인, 회심자들의 심령을 채워 양육 하는 것도 역시 하나님의 크신 선물이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위대한 단상 주제이며, 모든 주제들이 이것을 그 중심 내지는 목적으로 삼게 된다.
바울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노라”(고전 1:23)고 하였다. 그는 이 말을 고린도후서 5장 18-21절, 갈라디아서 6장 14절, 그리고 그 밖에 여러 구절에서 거듭해서 언급하였다.
어떤 사람이 스펄전에게 찾아와 그의 모든 설교는 비슷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옳습니다. 본문을 택할 때에 나는 언제나 십자가에 직결 시킵니다.”라며 시인하였다 한다.
참 설교는 그 주제의 범위가 제 아무리 넓다고 해도 결국 그리스도의 선포로 집약되기 마련이다.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않는 주제는 결코 강단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설교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로 이 위대한 진리에 철두철미하게 집착한다. 그 진리는 그것의 설명이나 적용 방식이 달라져 오고 있기는 하지만, 목사의 메시지 주제는 변경 불가능 한 것이다.
요한복음 6장 63절에 따르면, 강론은 냉담하고 차가운 말이 나열이 아니고, 오직 성령과 생명으로 충만한, 영혼을 변화 시키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목사의 심령은 성경 연구와 이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사상의 각성에 의해 품위를 갖추게 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설교자는 풍부한 개인적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말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설교의 종류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 핵심은 말씀되고 기록된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다. 성경과 그리스도는 분리 불가능이다. 기록된 말씀은 변조 하는 것은 살아 계신 말씀을 모독 하는 행위이다. 성경을 드높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높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같으며,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것이다(히 13:18, 시 119:89).
말씀을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말씀을 영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말씀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성경 속에서 발견 할 수 있다.
설교 방식에 관련하여 W.A. 크리스웰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수칙을 내 세운다.
첫째, 목사의 설교가 다양해야 한다.
우리는 강론의 모든 유형을 다 활용해야 한다. 우리는 방법, 접근, 강조점, 재료 등을 끊임없이 새롭게 갈고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지력과 생산성의 유지를 위해 작물을 윤작하는 지혜로운 농부를 닮아야 한다.
둘째, 블랙우드 경은 그의 저서 <설교 준비법>에서 스트리터의 “기도에 관하여”의 내용 중 다음 수칙을 인용한다.
“건전한 능력을 소유한 한 사람이 어떤 주제와 관련한 시리즈를 구성할 경우, 그것은 탁월한 웅변가에 의해 연설된 동등한 수의 토막 강론보다 훨씬 오래 남은 깊은 인상을 되새긴다. 회중은 지난 시간의 설교 내용을 상기한다. 따라서 기대 속에 다음 시간에는 무슨 내용을 말할 것인가 전망한다.”
셋째, 세 번째 수칙은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의 가장 훌륭한 방법으로 귀결된다. 즉 그것은 강해 식으로 설교하는 것이다. 모든 강론 중 가장 좋은 것은 강해 식 설교이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훌륭한 교회를 세우는 방법이요, 명명백백하게 설교하는 방법이다.
이렇게 설교 할 때 설교자 자신도 큰 유익을 얻는다. 그 자신도 배우게 되며, 심령이 자라나고, 성경에서 읽는 메시지가 그의 피와 살로 화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회중과 세계에도 무한한 유익을 준다. 그들이 성경 공부하는 법을 배우며 하나님의 메시지를 깨닫고 마침내 성경과 친밀해 진다.
현대의 여러 가지 비극중 하나는 성경이 대체로 사람들에게 봉인 된 책이 되어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설교 방식이 어떤 방식이든지, 우선 청중을 고려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생활 속에 적용하는 일은 큰 난제이다. 청중들의 의지와 양심과 지성에 호소해야 할 것이다.
메시지는 회중들을 위한 것이지 결코 허위, 과시, 꾸밈, 등의 이기적 동기 충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설교를 통해 양떼들을 교육해야 한다.
에베소서 4장 11절에는 목사와 설교자는 긴밀하게 연결 되어 있다.
헬라어로 목사 - 교사로 동일한 인격이다. 만약 모든 설교가 온통 선동 연설이라면 20분도 너무 긴 시간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설교자가 메시지를 통해 주님의 말씀과 그 뜻을 가르친다면, 20년도 짧기만 할 것이다.
목사는 은혜 안에서 그리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도록 보살핌으로서 베드로 후서 3:18에 나오는 시몬 베드로의 권면을 실천하도록 도와야 한다. 설교를 통한 교육은 사람들의 신앙을 살찌게 한다.
설교자는 자신에게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양떼들에게 설교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면서 그들의 두 눈과, 그 마음의 생각, 그리고 그의 목소리 크기에 까지 그들에게 모든 것을 집중하여야 한다.
모름지기 설교자의 생활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끌어당기는 자석 이어야 한다. 이 자석이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뜨려 놓는다면, 이것은 비극이다.
언제나 설교는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 기도가 설교 내용을 전달하는데 돕는 힘은 아주 독특하다.
모세처럼 하나님과 교제하고 산에서 싱싱한 모습으로 내려와 백성들과 이야기 하듯이 설교하게 하는데 있어서 이처럼 도움이 되는 것도 없다.
먼저 그들을 대신해서 하나님과 씨름해 보지 않고서는 힘 있게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수 없다.
기도가 인간적인 방법으로 능변을 발휘하게 하진 못할지라도 설교자를 진실 되게 할 것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말을 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웅변이다. 이 마음의 웅변이 있어야 하늘의 불이 제물을 불사르며 이렇게 해서 그 제물이 주님께 받아 들여졌다는 점이 입증이 된다.
하나님의 영에 의존하는 설교자 대부분은 자신들의 가장 싱싱하고 최상의 생각들이 사전에 명상해 둔 것이 아니라 마치 천사의 날개를 타고 날아오듯 순간적으로 더 오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이다.
그야말로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하늘의 손길이 순식간에 가져다 준 보물단지이며, 몰약의 산악 지대에서 바람에 실려 온 낙원의 꽃씨가 아닐 수 없다.
데오도루스는 루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기도를 엿들은 적이 있다. 맙소사. 목숨과 혼을 다 바쳐 기도하는 그의 열성이여, 하나님을 상대하듯 정중한가 하면, 친구를 대하듯 자신 만만하게 기도는 것이다.
목회자의 설교가 살아 있는 교회가 부흥한다고 한다.
아무리 교회의 시설이 양호하고 위치가 좋을 지라도 설교가 지루하고 청중이 알아듣지 못한다면 성경적인 교회 성장은 기대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미래의 바람직한 설교는 성경 중심의 복음적인 설교이며, 영혼을 구원하는 열정적인 설교이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설교이며, 성령 충만한 설교이며, 영혼을 치유하는 쉬운 설교이며, 창조적인 설교이며, 생활 속에 적응 가능한 설교가 되어야 한다.
목회에서 설교보다 더 권위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요소는 없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강단에서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이다. 지도력의 품격은 우리가 설교에서 나타내는 도덕적 영적 권위에서 생긴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공적인 증명이며 하나님께서 교회와 세상에게 말씀하시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다. 권위가 없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본질을 잃게 한다. 그것은 마치 무기가 없는 군인과 같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고유한 권위가 필요하다.
현 시대는 설교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과학 기술 시대, 특히 텔레비전은 깊이 생각하고 말로 하는 강연에 아주 나쁘게 작용하고 있다. 영상과 음성 바이트가 날이면 날마다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는 전자 커뮤니케이션의 특징이 되고 있다. 그리고 청중이 젊으면 젊을수록 구두에 의한 커뮤니케이션이 더욱더 어려워진다.
우리 목회자들은 지금 주의 집중력이 부족한 사람들에게 설교를 행한다.
우리의 청중은 그들의 마음속에 리모콘을 가지고 우리 앞에 앉아 있다.
강력한 전자 자극에도 무디어지고 있는 현대 교인들은 우리의 설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가지고 듣는 경우가 드물다.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기가 더욱더 어려워지고 더군다나 계속 주의를 집중시킨다는 것은 더욱더 어려운 일이 되어 가고 있다.
6. 목회자의 권위
목회자에게 중요하게 요청되는 것은 권위이다. 목회자의 권위의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고 권위를 바르게 사용해야 한다. 목회자가 권위를 바르게 행사하고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훈계가 분명해져야 한다.
한국교회가 바르게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치리가 살아나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a. 권위의 상실
근래와 와서 인류 사회는 전통적인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권위 상실의 시대를 맞고 있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권위를 가지고 있던 부모, 스승, 윗사람에 대한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전통적인 권위가 권위주의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초등학교 선생님이 매로 훈계했다고 고소를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권위주의는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권위 자체는 살아 있어야 교회의 질서도, 사회의 규범도 바르게 정립될 것이다.
권위는 목회자의 생명이다.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목회자의 권위와 지도력을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아무리 풍부한 지식과 다양한 기능을 가진 목회자라고 해도 권위를 잃으면 그 지도력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강단에서의 말씀 선포 기능은 누구와도 타협 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위로부터 주어진 권위가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목회를 한다는 것은 참으로 목회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세계 제 2차 대전이후에 현대 목회자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목회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권위의 상실은 현대사회의 급격한 변화가 몰고 온 부산물 가운데 하나이다. 세계적인 경향이다.
b. 새로운 권위의 개발 및 회복
전통적인 의미의 권위의식이 무너져 가는 이때에 목회자들이 다시 옛 권위를 복구를 지향한다면 역사의 흐름에 역행하는 태도가 될지도 모른다. 오히려 무너져야 할 전근대적인 개념의 권위주의는 무너지게 내버려두고 영원히 불변하는 권위를 새로운 의리로 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한 목회자의 자세이고 사명이다. 이런 권위의 위기에 직면한 목회자들의 일반적인 동향은 다음의 세 가지로 분류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 권위의 상실과 함께 목회를 완전히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1970년대 구미 세계에서는 이런 현대 교회 현상을 “성직자의 출애굽시대”라고 할 만큼 많은 목회자들이 주어진 목회 현장을 버리고 다른 일터로 찾아 나섰다. 1950-1960년대 구미 교회의 통계 조사에 의하면, 매년 3천여 명의 목회자들이 목회를 포기하고 다른 직업을 선택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권위 상실에서 오는 좌절감 때문이었다. 바꾸어 말하면 권위주의에 대한 반항이며 목회자를 특종 인간으로 가두어 버리는 교회와 사회에 대한 항변이기도 했다.
두 번째로, 권위의 상실을 의식한 목회자들은 영적체험으로 상실한 권위를 방어해보고자 하였다. 물론 목회자들의 권위의 순수한 인간적인 것뿐 아니라 소명에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그런 대처의 타당성을 부인 할 수는 없다.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우리가 체험한 소명의식이 약해 질수 있다.
바울도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메섹에서 있었던 신비스러운 소명의 체험을 재확인하고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하는데 노력했다. 그러나 어떤 신비의 체험을 방편으로 종래의 목사의 권위를 방어하고 강화 하려고만 하는 것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이런 결과로서 생기는 지나친 개인주의, 과장된 영적 체험은 장기간 지속 될 수 없고 이런 방법은 또 다른 부작용을 낳게 하며 목회자들이 독선주의에 빠지거나 교회를 분열 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권위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이런 신비적 체험으로 권위와 위기를 극복한다는 것은 부정적인 결과만 초래하고 말았다.
세 번째로, 이런 권위 상실의 위기를 인식한 대다수의 목회자들은 적극적인 출구를 찾아 나섰다. 그것은 무책임한 탈출이나 위장된 방어 태세가 아니라 현대 교회에 있어서의 권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모색하면서 건설적으로 대처 하려는 것이다.
교회의 안과 밖에서 권위의 상실을 뼈저리게 경험한 많은 지도자들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의 권위의 개념에 대해서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근까지의 연구한 결과를 요약하면 전통적인 사회에 있어서의 권위는 그 직위에 따라서 좌우 되었으나, 오늘과 같은 현대 사회에서는 기능에 따라서 권위가 좌우 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여러 형태의 사역자들은 그 부르심(소명)과 동시에 주어졌다고 믿었다. 가령 목사가 안수를 받을 때 “말씀을 전파하는 권한”과 “성례전을 집행하는 권한”을 부여 받는다.
그래서 바울의 경우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도직”을 거듭 강조하였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그 기본적인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권위와 함께 “위임받은 그 일”을 감당하는 기능면에서 권위는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은 “너희가 알거니와 세상에서는 통치자들이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높은 사람들이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자는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인자가 세상에 온 것도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5-28). 7. 목회자의 갈등(스트레스)
다윗은 전쟁이 열기를 내 뿜는 도중에 풀이 죽은 적이 있다. 이것은 주의 종들 모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보통 때는 신이 나 있다가도 때때로 기가 죽는 우리들이다.
강자라고 언제나 원기 왕성하지만은 않으며, 용감한 자라고 언제나 당당한 것만도 아니며, 쾌활한 자라고 언제나 즐거운 것은 아니다. 깊은 정신적 의기소침, 그것도 결코 한두 번이나 극히 드물게 찾아오는 그런 종류가 아닌 우울증 등 매우 많은 것들이 갈등하게 한다. 유명한 목회자들도 무서운 좌절의 시기는 그들 대부분 아니 그들 모두에게 다 있었다.
루터만 보더라도 수천 번 풀이 죽었지만 그렇다고 결코 허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영혼은 가끔 환희의 칠층 천에 올랐는가 하면 자주 절망의 밑바닥을 기기도 했다. 그의 임종의 자리까지도 이 폭풍은 그치질 않았다.
그는 심하게 지친 어린이처럼 훌쩍거리며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빛의 자녀들이 가끔 어둠 속을 거니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새벽을 알리는 전령들이 때때로 캄캄한 밤중에 놓여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겠는가?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들이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허약을 두르고 슬픔을 상속 받은 것이다.
외경의 현인 말이 참 옳다고 생각된다.
“인간이면 누구나 고생스럽기 마련이고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는 날부터 만물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그날까지 아담의 자손들이 지는 멍에는 무겁다. 그들이 생각하는 것이나 그들이 마음속에서 두려워하는 것은 마지막 날, 죽음에의 불안이다. 영광의 왕좌에 앉은 자로부터 땅 바닥이나 잿더미에 쭈그리고 앉은 자에 이르기까지 인생은 분노와 시기, 고난과 불안, 죽음의 공포와 원한 그리고 싸움일 뿐이다. 잠들고도 잔 것 같지 않게 대낮에 감시 받는 것같이 악몽에 시달리면서 싸움터에서 도망치는 사람과 같이 환상에 쫓겨 다니다가 구조를 받을 순간에 깨어나서 그 공포가 한낱 꿈이었음을 알고 놀란다. 사람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뭇 생명에게 벌이 있지만 죄인들은 일곱 배의 벌을 받는 것이니.”
목회자들이 갖는 갈등의 유형은 다음과 같이 분류해 볼 수 있다.
a. 압박감
압박감이란 어떤 행동 기준에 꼭 맞추려 하거나 급속한 변화에 적응하려고 할 때 경험되는 긴장 상태이다. 압박감에는 내부 압박과 외부 압박이 있다. 내부 압박은 자존심의 유지와 관련이 있다. 보다 높은 수준에 대한 내부적 압박감은 성취감을 느낄 때 생산적인 결과를 가져오는데 대하여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나 목표에 자신을 밀어 붙이는 내부적 압박감은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외부 압박은 경쟁과 사회 조건의 급속한 변화에서 비롯된다. 또 가족 및 친구들로부터 의 기대 등에서도 오기도 한다.
목회자들에게는 외부 압박 보다는 내부 압박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더욱 많다. 외부 압박에 대해서는 직업상 초연한 입자에 서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삶의 모든 초점이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에 있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특수한 삶의 표준을 선포하는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목회자의 경우에는 외부 압박을 받는 대신에 내부 압박에서 받는 척도가 더 심화 될 수밖에 없다.
목사의 내부 압박이 심할 경우에는 이중 의식과 위선 행위를 조성시켜 준다. 목회자들에게서 이중적인 삶의 태도가 타인에 비해서 더 크게 엿보임은 바로 그 때문이다. 외부 압박이 있다면 평신도들에게서 받는 경우도 있고, 교단으로부터 받는 압박도 있다.
b. 불 안
불안이란 대상이나 원인이 없이 왜 불안한지를 모르는 채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정한 상태를 말한다. 또 불안은 목회 생활의 객관적인 평가와는 모순인 듯싶은 감정이기 때문에 상당히 주관적이고 부담스런 것이다.
프로이드는 불안을 객관적 불안과 신경증적 불안으로 구별하여 설명했는데 객관적 불안을 환경에서 자각된 위험에 대한 현실적 반응으로 이해했고, 신경증적 불안은 개인 안에서 이루어지는 무의식적인 갈등에서 생기는 불안으로 이해되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신경증적 불안이 심화되면 교단 안에 있는 문제아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c. 좌 절
좌절이란 목표나 목적의 달성이 방해 받거나 지연될 때의 경험이다. 즉 방해물 때문에 목표의 접근이 금지된 상태를 말한다.
콜맨과 하메의 이론에 따라 목회적인 좌절의 발생 근원을 다음 5가지로 적용시켜 열거할 수 있다.
① 행동 과정의 지연 : 진급 과정 중에 진급이 안 될 경우,
② 자원의 결핍 : 수입이 적은 목사 가정의 궁핍(특히 농어촌 목회자)과 빌딩 임대 교회의 운영난 봉착 현상,
③ 상실 : 가까운 친구 목사를 잃었을 경우,
④ 실패 : 오늘날과 같은 경쟁 풍토에서 좌절감의 단골 요인인데 많은 목회자들이 성공의 척도를 성도의 숫자(양적 팽창)에다 두고 있는 데에 문제의 초점이 있으며 또 실패에 따르는 죄책감의 심화로 스트레스가 더 쌓이게 된다.
⑤ 목회생활에 대한 무의미감 : 성직에 대한 소명감 부족심리로 말미암아 일종의 목회적 무력감에 빠지고 만다.
d. 갈 등
갈등은 두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세 가지 또는 네 가지 이상으로 엉켜 상반되는 요청, 기회, 욕구 또는 목표에 당면했을 때에 경험되는 스트레스이다. 목회적인 갈등은 “접근 - 회피”라는 상반되는 반응 경향으로 설명될 수가 있는데 레윙(1935년)의 이론에다 목회 상황을 적용시켜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접근 : 두 가지 바람직한 목회적인 목표를 나름대로 설정해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② 회피 : 이것도 저것도 피할 수 없는 경우의 갈등으로서 두 가지의 바람직하지 않거나 위협적인 가능성에 부딪치는 경우의 갈등이다.
e. 불확실한 영적 상태
현대의 목회자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한가?
목회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를 참고해 보면 그리 희망적이지는 못하다. 우리는 그 조사를 통해 목회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스트레스와 문제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유익을 얻을 수 있다. 목회를 그만 두고 싶어 하는 목회자들이 너무나 많다는 현실이다.
고든 맥도날드는 몇 년 전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통계 조사에 따르면 목회자들의 3분의 1 정도가 자신의 천직으로 여겼던 목회의 소명을 버리고 다른 직업을 구할 생각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것을 실제로 목회에 뛰어 들었다가 이내 그만두고 세상의 일반 직업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의 비율과 거의 비슷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그 비율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 형편이다.
90년대 초반의 공신력 있는 한 통계 조사에 따르면 조사대상 5천명의 미국 목회자 중에서 40%가 앞으로 3개월 이내에 목회를 그만두고 다른 직업을 찾는 방안을 심각하게 고려중이라고 응답했다.
한국의 실정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마땅히 전직할 자리가 없어 곤고한 목회 일을 계속하고 있다든지 아니면 무임목사로 전전하는 분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가장 대표적인 가정 사역 단체의 부총재인 런던은 이렇게 논평했다.
“목회자들은 자신들이 목회 사역에 시달리며 희생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목회 사역이 그 어느 때보다 힘들고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목회자들은 너무나 힘들게 일하고 있지만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사역의 열매는 좀처럼 맺히지 않고 있다.”
⑴ 목회자들에게 압박감을 주는 문제들,
① 영적인 문제
우선 영적인 문제가 있다. 사단이 교회를 공격할 때 목회자를 가장 먼저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을 하던 진짜 전투는 회중석과 강단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사와 권위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엡 6:12) 대항하여 벌어진다.
사단은 목사가 예수 그리스도를 능력 있게 전파하는 것을 결코 수수 방관하지 않는다. 사단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교회 안에서 시작되고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망쳐 놓으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목자의 가정과 인격이 파멸되어야 한다고 판단되면 사단은 주저 없이 그렇게 한다. 목자를 치면 양은 필연적으로 흩어지게 되어있고 교회는 깨어지는 법이다. 목사가 무너지면 그 목사가 사역하는 교회만 영향을 받는 것이 아니다.
현대 대중 매체의 놀라운 발달과 함께 기독교의 잘못된 점만 부각시켜 시청률을 높이려는 미디어 집단이 욕심으로 인해 한 사람의 실족은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의 삶에 까지 나쁜 영향을 미친다.
몇 해전만해도 방송 매체들이 앞 다투어 유명 목회자들의 스캔들 및 교회의 비리들을 파헤쳐 폭로하던 때가 있었다.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부패상을 낱낱이 파헤치는 보도는 기독교에 대한 신뢰도를 끌어 내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자들의 공격의 불길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공격을 인간 조직의 공격이라기보다는 영적인 공격으로 보아야 한다. 원수 사단이 그 모든 것들의 배후에서 진두지휘하며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야 한다.
교회는 사단의 주요 공격 목표중 하나이며, 목사는 마치 피뢰침처럼 사단의 번개 같은 공격을 가장 먼저, 맨 앞에서 받는다.
이런 목회자들의 실족에 대한 소식이 많이 들려올수록, 양들은 성경적인 교회 운영의 원리 대신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운영해 나가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나님의 원리가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방법대로 교회를 이끌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평신도는 평신도대로 마땅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양떼를 이끄는 목자에게 순종해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들의 힘으로 교회를 이끌려고 한다. 혹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교회를 이끌어 줄 것을 목사에게 요구하며 목자를 통제 하려고 한다.
이런 잘못된 관행은 결국 신학적으로 순수하다는 미명아래 양무리가 목자의 역할을 찬탈하는 계기를 제공한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목자의 권위는 이처럼 자기 방식대로 목자를 지배하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퇴색하고 완전히 허물어지게 된다.
② 감정적인 문제
감정적인 문제란 목회 탈진이라는 위험한 비탈길을 의미한다.
이 탈진 상태는 성도들의 비난이나 거짓 소문, 사람들을 만족 시켜야 한다는 압박감 등에서 오는 두려움이나 상처, 소외감 같은 감정적인 문제에서 시작된다. 많은 목회자들이 감정적으로 지쳐 쓰러질 때 까지, 무작정 힘을 소진하고 있다.
데이비드 피셔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역이란 상처투성이의 패전 병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목회를 하다보면 헛소문이나 근거 없는 비방을 지긋지긋하게 듣는다. 비난과 아울러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의 대상이 되는 것도 지겹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사람이 도대체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비생산적인 각종 회의로 얼마나 많은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른다. 내가 이런 일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나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뒷말을 하거나 은근히 빗대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 것도 이젠 지겹다. 진실을 밝히면 오히려 상처를 받게 되어 있다. 사실 그만두려고 결심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바울처럼 나도 울부짖고 싶다.”
③ 육체적인 문제
감정적인 압박감은 대개 육체적인 문제와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장시간 업무로 과로에 시달리고 있다.
교인들이 목사에게 기대하는 모든 일을 감당하려면 정말 시간이 부족하다. 목회자들은 필사적으로 노력해 보지만 결국 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탈진 상태에 이르러 잠시라도 멈출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
목회자들은 제대로 몸을 관리할 시간조차 없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이고, 그나마 먹을 때도 일에 쫓기어 인스턴트식품으로 대충 때우는 식이다. 운동할 시간은 더더구나 없다. 많은 목회자들이 충분한 휴식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설사 휴식중이어도 성도들이나 교회의 긴급한 문제 때문에 그 휴식은 이내 종료되고 만다. 한 밤중에 걸려오는 긴급 전화 때문에 잠을 설치는 일도 다반사이다.
④ 탈진
탈진은 현대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다. 구약성경과 신약 성경에서도 많은 탈진의 사례를 찾아 볼 수 있다. 예레미야는 깊은 절망, 무력, 탈진을 체험하였다(예레미야 4장),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쇠하였다고 표현 하였다(시편 6편). 탈진의 결과는 신체적, 감정적, 영적인 부분과 그리고 관계성에서 발생 될 수 있다.
신체적인 증상으로는 질병과 여러 가지 종류의 피로감이 여기에 포함된다. 어떤 사람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스스로 자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탈진 상태를 알려준다. 감정적인 결과로는 주어진 일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여기에 포함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조금만 노력하면 해 낼 수 있는 일들이 탈진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장애물처럼 느껴진다. 관계성에 있어서는 일에 임하는 자세와 관련해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개선 가능성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고수하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달라 질것이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희망을 잃게 되고 환멸이 자리 잡게 된다.
탈진으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은 종종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일이 중요하긴 한 것인가? 내가 이렇게 한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수고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목회자가 탈진에 이르게 되면 생이 의욕 및 목적을 상실하게 되고, 궤도를 벗어난 위성처럼 목회 사역에서 이탈하게 되며,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기만족을 얻으려하고, 신체적으로도 이상이 나타나게 된다.
심리적으로는 환멸감이나 패배감을 가져다주고 그로인하여 분노, 냉소적 사고방식, 부정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영적으로도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되어 더욱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된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탈진의 위기를 경험한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을 향해 나아갈 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술 신앙과 거역, 불순종과 불평에 대한 분노로 몹시 지쳐 있었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했으며, 요나도 니느웨에 대한 자신의 기대가 실현되지 않으므로 죽기를 소원 했었다. 또한 위대한 전도자 바울도 살 희망을 잃고 사역을 포기할 정도에 까지 이르렀다.
성경은 탈진 극복의 실례들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구약에서 엘리야, 이사야, 예레미야를 통해 보여 주었고, 신약에서도 예수님 자신이 탈진의 극복의 실례를 보여 주었다.
이렇듯 탈진은 예방 될 수 있으며 또한 극복 될 수 있다.
목회자들은 자신에게도 탈진이 다가 올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예방적인 차원, 개인적인 차원, 개 교회적인 차원, 교단적인 차원에서 그 대책을 준비해야 한다.
목회자가 건강해야 한다. 목회자가 전인적으로 건강할 때 목회자의 가정과 교회가 건강해 진다. 목회자는 누구나 탈진 될 수 있다는 사실과 탈진이 실패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탈진은 예방 될 수도 있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능히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알아야 한다.
목회자 자신이 하나님이나 슈퍼맨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과로, 과식, 과욕을 피하고 하나님의 부르심과 은사를 따라 겸손함으로 사역하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적당한 음식 섭취 및 휴식과 운동, 행복한 부부생활 및 가정생활을 해야 한다. 또한 정기 적으로 자기 자신을 점검하고 측정하면서 건강한 목회자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C. 목회자의 자기 성찰
1. 목회자의 자아 성찰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딤전 4:16).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가장 불완전한 도구를 가지고 일 하실 수도 있다.
주님께서는 아주 빈약한 설교를 유용하게 하셔서 회개시키시기도 하고, 심지어는 설교자 없이 직접 자신의 성령을 통해 말씀을 적용하셔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도 하신다. 도구 없이도 일 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만의 절대적인 주권에 따른 행동을 목회자의 행동 지침으로는 삼을 수 없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성격에 따라 좋으실 대로 하실 수 있지만, 목회자는 그 분의 보다 더 평범한 섭리의 교훈대로 행동하여야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뚜렷한 사실이 들어 난다.
곧 주님께서는 일반적으로 수단이 목적과 일치하도록 하신다.
여기서 목회자가 배워야 할 것은 목회자의 영적 상태가 최상일 때 가장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목회자가 일반적으로 주님의 일을 최상으로 해낼 수 있는 때는 목회자의 자질과 감정이 질서 정연하게 놓여 있을 때다.
그렇지 않고 헝클어져 있을 때에는 가장 형편없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목회자가 지침으로 삼을 수 있는 하나의 실제적인 진실이다. 주님께서 예외를 두시는 경우도 있지만 이것 역시 그 원칙을 입증할 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목회자는 자신의 연장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질서 정연하게 정돈하여야 한다.
목회자가 복음을 전파하고 싶을 때 목회자는 자신의 음성만을 사용 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의 성대를 훈련 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려면 두뇌를 사용하고, 느끼려면 마음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의 지적, 정서적 능력을 길러야 한다. 이 거룩한 임무에서 가장 필수적인 조건과 무기는 목회자 자신의 영과 혼 그리고 몸이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영적 자질과 내면의 생활이야말로 목회자의 필수 조건이며, 필수 무기이다. 복음 선포 자가 스스로 영적인 갈등이나 고갈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지신과 그가 하는 일 양쪽에 더 없는 하나의 재앙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쉽게 이런 악이 저질러지는지, 따라서 어떻게 눈을 똑바로 뜨고 이것을 경계해야 하는지, 너무나 쉽게 생각 할 수 있는 일이다.
어느 목회자가 다른 모든 명에서는 유익하다 하더라고 어느 작은 결점 때문에 심각한 방해를 받거나 전적으로 쓸모없이 되는 경우가 있다.
가장 위대한 결과를 낳아야 할 복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더욱 더 심각한 것이다.
미국이 진 두 세 건의 전쟁을 분석해 보았더니, 어떤 가짜 군납업자들이 군대에 제공한 불량 화약이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 한다. 이런 이유로 해서 미군의 포탄이 제 화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목회자 자신의 목표를 맞추지 못하고 목적과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우리 속에 참 생명력이 없거나 하나님께 계속적인 축복을 받을 정도로 그 생명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결론은 “가짜 목회자”가 되지 않도록 각성하자는데 있다.
가장 우선적인 한 가지는 목회자 자신이 구원 받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필수 조건은 참되고 순수한 신앙심이다. 어떤 목회자가 어떤 소명을 받든 간에 거룩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히 이 목회 직에 대한 소명을 받지 못한 사람이다.
랍비들은 “먼저 너 자신을 단정하게 하라. 그런 다음에 네 형제를 치장하라”고 말한다.
우리의 소금이 짜지 않다면 어떻게 간을 맞추겠는가?
목회자에게 회심이란 하나의 필수 조건이다.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회심 여부를 두고 큰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다.
진정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택하셨다는 사실 더욱 확실하게 깨닫는 것”은 결코 누워서 떡 먹기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 세상은 가짜로 가득 차 있고 육적인 기만을 부채질 사람들로 가득한데, 시체 주의로 독수리가 몰리는 것처럼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 주위로 몰려든다. 우리 자신의 마음이 간사하기 때문에 진리는 표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이라는 우물 깊숙한 데서 진리를 퍼 올릴 수밖에 없다.
남에게 선포하면서도 자신은 버림받은 자들이 되지 않으려면 매우 열심 있게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을 살펴야 한다.
목회자가 복음을 선포하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이 보다 더 끔찍한 일이겠는가? 회개하지 않는 목회자의 사역에는 더 없이 부자연스러운 관계가 따르기 마련이다.
은혜가 없는 목회자, 그는 장님이 안과 교수로 선발되어 빛과 시야가 어떻다느니, 자신은 깜깜한 어둠 속에 있으면서도 무지개 빛깔의 미묘한 혼색이 어떻다느니 하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벙어리가 음악 교수 노릇을 하는 셈이요, 귀머거리가 교향곡의 화성에 대하여 달변을 늘어놓는 셈이다. 그는 독수리 새끼를 훈련시킨다고 큰 소리 치는 두더지 격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전혀 자격이 없는 일에 뛰어 들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런 목회자의 자리는 더 없이 무시무시한 것이다.
영적 생활이 없다면 그 목회자에게는 전적으로 영적인 일에 손을 댈 자격이 없으며, 목회를 그만 두고서 가장 간단한 첫 번째 자격 요건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 마땅한 것이다.
리처드 백스터의 참 목자 상(생명의 말씀사 역간)에는 여러 심각한 문제가 분제가 기술 되어 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면, “남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제공하면서도 자신에게는 은혜가 없는 경우는 없도록 하라.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효과적인 역사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은 되지 말라. 이 세상에 구주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면서도 자신의 마음속으로는 그 분을 소홀히 대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사람은 별과 같이 비취리라(단 12:3)는 약속이 있기는 하지만, 그 약속에는 그 사람 자신이 먼저 의의 길에 서 있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붙어 있다. 먼저 그런 약속들은 이 기본 전제가 입증된 다음에 덧붙여져야 한다. 먼저 그들 자신이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영광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거의 유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자격 요건을 갖춘 다음에 그들이 목회자로서 매우 애쓴다며, 그들의 영광은 더욱 클 것이다. 고통 받는 자리로 가지 말라고 남들에게는 경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자리로 달려가는 사람이 많다.
자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최선을 다해 지옥을 피하라고 소리친 설교자들 가운데서도 지금은 지옥에 있는 사람이 많다. 남들에게는 구원을 제공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진리를 소홀히 여기고 깔아뭉개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겠는가?
목회자들이여, 이것만은 꼭 믿으라, 하나님은 당신이 설교자이기 때문에 혹은 유능한 설교를 하기 때문에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의롭고 거룩하게 되어 주님의 일에 한 결 같이 충실하기 때문에 구원하신다는 것을, 그러므로 남들에게 요구하는 인간상을 먼저 그대 자신이 갖추라. 믿으라고 밥 먹듯이 남들에게 타이르는 말을 그대 자신이 믿으라. 남들에게 전하는 그리스도와 성령을 그대 자신이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분의 말씀 속에는, 네 몸과 남들을 미워 멸망시키지 말고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형제들이여, 이 계명을 명심하라. 여기에 더 이상 덧붙일 말이 있을 수 없겠으나 나는 부디 여러분이 스스로를 점검하고 유용하게 사용하길 기도하는 바이다.”
어거스틴은 자기 성찰에 대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책임감에 바탕을 둔 이른바 내면의 사람을 가꾸는 일에 관해 무엇인가 교리적인 면에서 시도를 해야겠다고 결코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기 성찰에 대한 자신의 노력이 목회 지도자들에게 하나의 유익한 모델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양떼를 다스리는 능력, 즉 교회를 이끌어 가는 그의 능력은 자신이 책임 있는 사역을 위해서는 자신의 영혼이 건강과 활력으로 넘쳐야 한다는 인식에 나온 것이 분명한 것 같다.
어거스틴은 오늘날의 영적 지도자들이 본받아야할 뛰어난 본보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시대는 물론 다음 시대에 이르기까지 영적 지도자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이러한 인물이 잊혀 져서는 안 된다.
영적인 자기 성찰이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의 모범적인 삶은 이전보다 오늘날에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손에 들린 놀라운 무기가 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께 대한 깊은 애정을 지님과 동시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목회자의 신앙심이 열성적 이여야 한다. 왕이 필요하다면 왕좌로 추대할 수 있는 자격의 사람을 뽑아야 하며, 우리 가운데 가장 마음이 약하고 수줍어하며 가장 육신적이요 가장 균형 잡히지 않은 사람들은 강대상에 적합한 후보생이 될 수 없다.
존 제임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를 외치는 설교자가 죄인들의 길을 가로 막을 때 그는 자신의 회개가 자신의 죄 만큼 유명해지기 전에는 많은 회중의 자리에서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아야 한다.”
암몬 자손들에 의하여 수염이 깍인 사람들은 여리고에 머무르면서 수염이 자라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것은 불명예스런 수치를 저지른 사람들에 빈정대는 투로 말하지만, 슬프게도 평판이라는 수염은 한번 깍이면 여간해서 다시 자라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공개적인 부도덕은, 이에 대한 회개가 제 아무리 깊다 할지라도 그 사람의 성품에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전혀 없다는 치명적인 상징이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고 남들에게서 기대 되지 않는 용감한 전투를 치룰 준비 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가 날마다 갖추어야 할 덕목들은 자기 부정, 자기 망각, 인내, 불굴의 용기, 참을성 등이다. 이런 것을 모두 충분히 감당할 사람이 어디 있는가? 목회자의 소명에서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인정하려면 하나님 바로 곁에 살아야 한다. 목회자로서 당신의 생애가, 특별히 당신의 모든 목회 생활이 당신의 신앙심의 활력으로 생기를 띠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의 열심이 식으면 강대상의 기도 또한 신통치 않을 것이고, 식구끼리의 기도는 더욱 형편없을 것이며, 서재에서 혼자 하는 기도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엉망일 것이다.
목회자의 영혼이 여위면 당신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까닭도 모른 채 당신의 공중 기도가 자신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목회자인 당신보다 먼저 당신의 메마름을 눈치 체고 말 것이다.
3. 철두철미한 신앙심
목회자의 신앙심이 철두철미 해야 하는 것은 일반 평신도 보다 더 큰 위험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목회 직 보다 사탄의 유혹이 극심한 곳도 없다. 목회자를 유혹하는 위험은 평신도들이 당하는 것보다 더 많고 끈질기다.
목회 직이란 일터를 유혹이 없는 아늑한 피난처쯤으로 생각하는 일반인들의 통념과는 달리 목회자가 당하는 위험은 더 세고 험난한 것이다.
목회자는 존경을 받는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이점은 있을지 모르지만, 그 존경은 매우 위험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자세로, 섬기는 자세로, 그리고 철두철미한 신앙심으로 무장하지 않으면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탄은 목회자 영혼의 대적으로 설교자의 파멸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다가온다.
백스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심하라, 유혹하는 자가 제일 먼저 당신을 가장 얼얼하게 공격할 것이다. 이 유혹자에 대하여 당신이 대항하여 싸우는 전쟁의 지휘관 노릇을 하는 경우, 그것은 그 유혹자가 당신을 가만 놔두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제어하시기 때문이다. 이 유혹자는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끼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악의를 품고 있다. 그가 미워하는 대상은 우리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곧 우리의 야전 사령관이자 우리 구원의 대장이시며, 흑암의 나라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보다 더 위협적이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자는 사병보다는 그리스도의 휘하의 지휘관(목회자)을 주목한다. 자신들 앞에서 지휘관이 쓰러지면, 사병들이 모조리 도망치리라는 것을 유혹자는 뻔히 예상하고 있다. 그는 아주 작은 자나 아주 큰 자와는 싸우지 않는다. 이 지휘관들과 싸우는 것이 더 쉽다는, 곧 목자를 치면 양떼가 흩어진다는 비결을 알고 오랜 세월 동안 시도해 왔다. 이 방법에 따른 성과가 너무도 크기 때문에 이 유혹자는 가능한 이 길을 따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이여, 조심하라, 이 대적은 바로 당신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그는 교묘한 방법으로 환심을 사려 들고, 쉬지 않고 보채며 막강하게 공격해 올 것이다. 현명하고 학식 있는 자들이여, 대적에게 당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마귀는 당신보다 뛰어난 자요, 더욱 재치 있는 논쟁자이다. 아니 그는 빛의 천사처럼 보이는 탈을 쓰고 나타나서 당신을 속일 것이다. 그는 깜 쪽같이 파고들어 당신을 다리를 걸어 넘어뜨릴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그가 요술을 걸어 믿음과 순진함을 빼 가는데도, 당신은 그것을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니 벌써 오래전에 없어졌는데도 당신으로 하여금 그것이 배로 늘어나고 있다고 착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미끼가 당신의 코앞에 어른거리는 동안 당신은 낚시 바늘도 낚시 줄도, 심지어는 그 교묘한 낚시꾼도 보지 못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미끼는 당신의 성격과 취미에 딱 맞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언제든지 자신에게 유리한 요소를 당신 속에서 얼마든지 발견하여, 당신 자신의 원칙과 성향을 통하여 당신의 속을 드러낼 것이다. 당신을 파괴 할 때 마다 그는 당신 자신을 파멸의 도구로 삼을 것이다. 한 목회자를 게으르고 불성실하게 만들고, 그를 유혹하여 탐심이나 추문에 빠지게 하는 것을 얼마나 크나큰 승리로 여길 마귀이겠는가? 마귀는 교회에 다음과 같이 뻐길 것이다. 이 사람이 당신들의 그 거룩한 목회자이다. 그들의 빈틈없음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의 꼴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 주겠다. 그러고 나서 마귀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할 것이다. 이 사람들이 당신의 전사인가? 당신의 종들 가운데 제아무리 잘난 놈이라도 나는 그로 하여금 당신을 욕하게 만들 수 있다. 당신의 집의 하인들로 하여금 모조리 배신하게 할 수 있단 말이다. 마귀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하나님께 대 들면서 욥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대면하여 욕하게 하겠노라고 떠벌이던 마귀이다(욥 1:11). 만약 정말로 우리에게 마귀가 승리를 거두고 나면 얼마나 기고만장 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마귀는 당신에게 마구 모욕을 주면서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의 믿음이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믿게 만들 것이다. 당신의 거룩한 소명을 얼룩지게 할 것이요, 이전에 원수로 여기던 마귀를 섬기게 만들 것이다. 오, 마귀의 비위를 맞추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러 하여금 신나도록 하지 말라.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에게 썼던 수작, 곧 당신의 힘을 빼고서 당신의 눈을 뽑아 누워 떡 먹기 식의 승리를 거둔 다음에 조롱하는 수법이 당신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게 하라.”
4. 목회자와 성령
사도신경에 “성령을 믿사오며”라는 구절이 있다. 이 구절을 신조로 고백한 이상 우리의 체험 속에서도 경건한 독백이 된다.
목회자에게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하심이야말로 목회의 평생의 일을 지니고 있는 지혜와 유용성에 대한 확신의 근거이다.
성령은 지식의 영이다.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목회자는 성령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목회자는 무엇보다도 절실히 항상 새로운 학문을 연구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가 먼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양떼들을 가르칠 수 있으며, 목회자가 먼저 생각하지 않고서 어떻게 남들에게 생각하게 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는 성경을 앞에 놓고 혼자 앉아 있을 때 바로 성령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분 성령님만이 하늘 보고의 열쇠를 쥐고 있으며 상상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풍요하게 하실 수 있다.
제 아무리 깊은 교리라도 그분 성령님은 모두 풀어 헤쳐 주시며 진리의 길로 바로 인도 하실 수 있다. 성령님이 목회자에게 특별히 소중한 것은 그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에 대해서 가르쳐 주시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업적이 목회자 설교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다. 지혜가 따르지 않는 지식은 위험하며 지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기술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복음의 한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만 자칫 그 한 부분만을 잘못 강조함으로써 왜곡된 기독교의 진리를 제시할 경우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생활에서 왜곡된 성격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초기 한국 교회의 설교에 나타난 성령관은 1907년에 일어난 대 부흥 운동과 무관하지 않다. 1903년 겨울에 감리교 선교사들이 원산에서 한 주간에 걸친 기도회와 성경 공부를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여기에 남 감리교 선교사 하디목사가 참석하였다. 그는 캐나다 대학 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에 왔으나 일한 만큼 성과가 없자 초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중에 성령을 체험하고 동료 선교사들에게 자신의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한 증거를 가지고서 나의 게으름과 교만과 마음의 완악함과 신앙의 부족함과 또 그로 말미암아 맺어진 결과를 자복 하였던바 회중은 강한 죄의식과 회개의 체험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다. 지혜가 따르지 않는 지식은 위험하며 지혜는 우리가 아는 것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것은 그것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복음을 드러내고 그것의 효과를 보려면 전적으로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한 목회자이다. 우리는 제일먼저 하나님 앞에 성령으로 충만해야 한다.
D. 현대 및 미래 바람직한 목회자 상
1. 평신도가 바라는 21세기 목회자 상
오늘의 한국 교회는 개혁 교회의 전통과 에큐메니컬 정신을 구현하는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초대 교회의 모습을 잃어 가고 있으며, 교회의 안팎으로 비판의소리가 들려오는 상황에서, 목회자의 자질과 자세가 그 어느 때 보다 문제의 초점이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21세기 고도의 과학 기술 사회에서 새로운 목회 기술이나 방법도 중요하겠으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람직한 목회자상을 정립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은 목회자상에 관한 성경 이해를 통해 은유적으로 나타난 이미지를 몇 가지 고찰하려고 한다.
성경에 나타난 목회자상으로는, 자신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 없이 증언하는 예언자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밀을 맡은 자로서 그 비밀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나누어주는 청지기이다. 이러한 목회자상의 원형은 두말할 것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였으며 사도들의 일관 된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목회자상을 역사적으로 조명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받은 선포 자, 예언자, 청지기, 종, 목자로서의 목회자상이 초대 교회에서부터 변천하기 시작하여 감독자로서의 목회자상이 부각되었고, 중세 교회에 와서는 목회자가 섬기는 자가 아니라 섬김을 받는 자로, 더 나아가서 군림하는 지배자로 등장하여 물질 중심인 세속적인 암흑 속으로 빠져 들어 갔을 뿐만 아니라 가장 무서운 교권주의에 안주하고 말았다.
이렇게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는 종교 개혁기를 맞이하면서 본연의 자세를 찾아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섬기는 종으로서의 목회자, 영혼을 잘 돌보는 목회자로서의 이미지를 회복하게 되었다.
현대 교회에 와서는 급변하는 문화적 정황 속에 다양성을 띤 목회자, 전문화된 목회자, 응전적인 목회자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평신도가 바라는 목회자상은 소명의식이 철저한 목회자, 성경 중심의 설교를 하면서 호소력과 설득력을 갖춘 목회자, 민주형 목회자, 등이 있다.
2. 21세기의 바람직한 목회자의 자질
a. 진실한 인격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그래서 기독교는 어떤 추상적인 사고나 원리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서의 삶 자체이다. 한국 교회에는 선교 초창기부터 인격적으로 진실한 목회자상이 중요하게 부각되었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목회자의 중요한 자질로 인정되고 있다.
b. 투철한 소명감
⑴ 목회자 소명
예수님은 성령의 임하심으로 부르심을 받고(막 1:9, 마 3:16, 눅 3:21), 하나님의 보내심에 응답하였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 역시 자기들이 하나님에게서 보내심을 받았다는 소명의식이 철저하였으나 중세 교회에서는 성직 매매 등으로 내적인 소명감이 흐려져 칼빈은 목회자의 내적, 외적 소명을 강조하게 되었다.
칼빈은 소명감 없이 교회의 공적인 직무를 맡은 사람이 있어서는 결코 안 된다고 강조하면서, 교회의 참된 봉사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부름” 받을 필요가 있고 자기 소명에 응해서 충실히 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한국교회의 목회자상도 각 시대마다 목회자로서의 소명감을 다시 한 번 다짐하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회심 중심의 구원의 확신을 외치는 소명을 가진 자로, 그다음은 일제치하에서 고난 받는 종으로서의 소명을 가진 자로, 그리고 다음으로는 침체된 상황 속에서 자기 개혁과 동시에 소명감을 재발견하는 자로, 그리고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성스러운 직분을 받은 성직자로서의 소명감을 가진 목회자상이 나타났다.
따라서 목회자는 자신의 사역을 단지 세상 직업과 같은 차원에서 보면 안 되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사역의 도구로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는 강한 소명감으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현대 젊은 목회자의 선택 동기를 들어보면 언뜻 보아서는 바른 자세 같으나 자세히 모면 가끔 잘못된 동기도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직업보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평생을 살 수 있고, 더 많이 찬양할 수 있으며,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도이고, 성경보고 기도도 더 많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혹시 이러한 동기로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사람은 잘못 소명을 가진 목회자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목회자라고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고 정복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질서를 회복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기피하고 회피하는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일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세상의 여러 분야에서 예수님을 모르고 오랫동안 살다가 갑자기 은혜 받았다고 목회자의 길을 주저 없이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은혜 받았다면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목회자가 되는 것보다 그가 머물고 있는 그 자리에서 숭고하고 담대하게 신앙인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을 기대하실 것이다.
목회자의 소명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다른 사람들과의 바른 관계는 물론, 그리스도인으로부터 인격적 인정을 받는 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가 이 목회의 길을 위해 얼마나 하나님으로부터의 경건한 인도함을 받았느냐의 여부일 것이다.
갑자기 은혜 받았다고, 죽을병이 갑자기 완쾌 되었다고 선택하는 길이 목회자의 길은 결코 아닌 것 같다. 목회자도 성도와 같이 주의 일을 하는 동역자이면서도 영적으로는 지도자이다.
지도자란 오랜 시간 동안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밟아야하고 그 과정을 통해 훈련, 고민, 반성을 통하여 인격이 다져져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소명이 없는 경우, 목회를 할 때 자신도 교인도 힘든 경우가 많다. 목회의 길은 포기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오해하는 목회자가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 즉 부르심의 일은 목회의 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는 세상의 모든 일상적인 일도 그 분이 선하게 하심으로써 거룩한 주의 일이 되기 때문이기에 다른 직업으로의 전환도 가능하리라 생각되어진다.
⑵ 소명의식의 확인
예수님은 일생동안 자아의식을 가지고 살았다. 이 자아의식은 그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잠시도 그의 생각에서 떠나지 않은 것은 자기를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한다는 “메시아 의식”이었다. 이런 메시아 의식이 일생동안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확신과 능력을 가지고 사명을 완수하신 비결이었다.
현대의 목회자도 모든 것에 앞서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자신이 영적 지도자가 된 것은 자아에 의함도 아니요, 사람이 세운 것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세우셨다는 소명 의식은 헌신 생활의 기초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불러 세운 지도자는 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명 없이 예언자가 될 수 없고 전도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것은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서이지 자진해서 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아모스 선지자에게 왕성에서는 예언을 못하도록 금지령을 내렸다. 그때 아모스 선지자의 대답은 “나는 선지자도 아니요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다.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재배하는 자로다, 그런데 내가 양떼를 몰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부르셔서 이르기를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여호와의 부르심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바울도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내가 사도된 것은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와 오직 그를 살리신 아버지 하나님으로 인함이라”(갈 1:1) 고 하였다.
또 그는 “모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속에 나타내기를 기뻐하였느니라”(갈 1:5)고 하였다.
이렇게 볼 때 소명의 발의는 자신이나 어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강요이다.
우리는 이 소명을 사양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으며 어떤 방해가 있어도 중단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직의 발단이요, 원인이요, 지속 수행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언자 예레미야를 부르실 때에도 “너는 열방에 가서 예언하라”(렘 1:1)고 명하셨다. 예레미야도 모세와 같이 완강히 거부했다.
“나는 어린 아이라 말할 줄을 모르나이다.”(렘 1:7-10).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너를 복중에서 짓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고 강요하셨다.
신약 시대에 와서는 예수의 복음을 객관적인 입장에서 분명하게 해명할 수 있는 실력자가 필요했다. 하나님은 다소에 사는 사울을 적임자로 생각하시고 특이한 방법으로 그를 불러내셨다.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섭리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류 구원을 위해 극적으로 부름을 받은 복음의 사신이다. 이렇게 특별한 방법으로 부름을 받은 바울이기에 그는 하나의 지방 종교인 기독교를 짧은 기간에 역사의 중심에 세우는데 중처적인 역할을 했다.
옛날에는 하나님의 필요한 인물을 선택할 때 이렇게 직접적이고 극적인 방법으로 부르신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부르심의 내용에는 변함이 없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똑 같지는 않다.
그러나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한 것이라”는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은 아무에게나 해당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마다 꼭 필요한 사람을 부르신다.
그러므로 소명을 받은 사역자들은 자신의 전부를 바쳐 부르신 뜻에 순종하여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하기 때문에 소명 의식이 약해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다메섹 도상에서 있었던 그 신비스러운 구원의 확신과 소명감을 재확인 하곤 했었다.
바울은 그때의 사건을 언제나 새로운 사실로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하는데 방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다른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은 구원의 확신과 소명의식을 상실할까 늘 두려워한다.”고 했다. 이는 지난날 체험한 영적 변화와 신비스러웠던 소명을 의식을 회상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 받은 그 소명의 감격을 심화 시키자는 뜻인 것이다.
우리들도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옮긴 영적 체험이 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 때의 역사적 사건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더 높게 승화시켜 오늘의 체험으로, 오늘의 사건으로 재현 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부름 받은 성직자의 사역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체 되거나 평범해지고 무의미해진다는 것은 생각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처음 체험한 은혜를 소모만 하고 새로운 영적 세계를 개척하는 모험을 등한히 할 때 우리의 영혼은 황혼을 맞게 되고 사역의 의욕은 감퇴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목회자들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우리의 영적 생명을 언제나 윤택하고 유지하고, 우리의 사명감에 계속 성령의 불을 붙여야 한다. 만일 사역자들의 영적 능력이 쇠퇴만하고 새롭게 보충하지 못하면 그 때는 처음 체험한 구속의 감격과, 사역에 대한 매력과, 말없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기와, 넘치는 생명의 감촉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c. 민주적 지도자
민주적 지도자로서의 목회자는 세상의 민주주의 방식과는 달리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민주적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초대 교회에서는 목사, 집사, 장로들이 더욱 긴밀하게 사역을 위해 협동하였으나 중세에는 교권이 강조되어 이것이 중단 되었다.
그러나 종교 개혁기에는 루터의 만인 제사장 론을 비롯하여 목사를 성도들이 선출하는 것이 하나님 말씀에 적합하다고 함으로써 교회에 민주주의의 초석이 다져 졌다. 한국교회에서도 초창기에는 선교사 주도형이었으나, 얼마 후에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 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목회가 시작되었고 특히 해방 이후에 민주주의 열기가 드높아지면서 교회 밖의 민주주의 뿐 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자유와 평등과 박애의 정신을 소유한 민주적 목회자상이 강조되었다.
특히 교회 분열 등의 고난을 당하면서 민주적 연합 정신이 강조 되었다.
그러므로 미래의 목회자는 독단과 독선과 독재를 삼가고,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민주적 지도자가 되어 평신도들과 긴밀하게 협력하며, 평신도들이 능동적이고 창조적으로 목회에 참여 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주는 민주적 지도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d. 경건한 삶
초대교회에서는 이상적인 감독으로 경건한 사람을 들고 있다.
중세기에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영성 개발과 특히 십자가의 명상과 참회, 깨끗한 생활, 청빈 등에 의한 경건이 중요시 되었다.
종교 개혁기에는 말씀에 의하여 하나님께 권고 받는 것과 말씀대로 사는 경건한 삶이 강조되었고, 이것이 경건주의 부흥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현대 교회에서도 기독교 영성의 개발과 훈련을 많이 강조하고 있다.
한국 교회사에서도 초창기에는 목회자는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특징 지워졌는데 일제하의 암흑기에 신비주의 등으로 변질되기도 하였지만, 대체적으로 초창기부터 강조해온 성경에 뿌리박고 윤리적 변화를 수반하는 영적인 목회자들이 주류를 이루어왔다. 목회자와 성도들 모두 진실한 목회자 다음으로 성령의 능력을 가진 영에 속한 목회자를 좋아하고 있었다. 목회란 인간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존해야 되는 것이므로 우선 목회자 자신이 영성을 개발하여 경건한 삶을 사는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e. 연구열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배운 후에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였고, 초대교회의 사도들도 그리스도에게서 배운 바를 가르쳤다.
중세 때에는 헬라철학과 성경의 조화를 시도하는 스콜라철학이 발달하였으며, 종교 개혁기에도 비록 성경만을 내세우기는 했으나 대다수의 목회자들이 성경 원어와 라틴어, 또 당시 사회의 여러 가지 지식들을 활용하였다.
현대 교회에 와서는 대학을 중심으로 신학을 계속 발전 시켰고 오늘날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그 상황에 응답하는 목회자가 되기 위하여 여러 전문적 기술의 습득과 정보의 신속한 수용, 그리고 전문화 시대에 맞는 특수 목회를 수행하기 위하여 부단히 연구하는 목회자상이 나타나고 있다.
미래의 목회자는 급속히 변화하는 현실을 이해하고 목회에 필요한 전문적인 신학 지식을 갖출 뿐 아니라 복음을 더 잘 소화하고 양 떼들의 생활을 소상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늘 배우는 자세로 끊임없이 연구하는 되어야 할 것이다.
f. 온전한 헌신
헌신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헌신의 기본으로 삼는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이 신자가 될 수 없고, 전도자는 더욱더 될 수 없다. 온전한 헌신은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께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다. 헌신이란 말 속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하나는 몸이요, 두 번째는 산제사이다. 헌신, 즉 몸을 드린다는 말은 육신만을 드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이성, 감정, 의지, 시간, 재능, 지식, 재산 등 우리의 소유 전부를 드린다는 뜻이다. 산제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죄 사함을 받기 위함이고 두 번째는 감사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헌신 자가 드려야 할 산제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아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감사하며, 또한 우리를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시기 위하여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다. 산제사를 드린다는 말 속에는 “거룩하다”, “깨끗하다”는 두 가지 큰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첫째로 깨끗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몸은 거룩한 것, 즉 성별된 것이어야 한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지불한 피의 대가로 산몸이기 때문이다.
3. 목회자의 영성관리
영성의 시작은 비움에서 시작된다.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 되심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 2:7). 주님은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시기 전에 비우는 일을 먼저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그릇에 비유하셨다.
영성도 그릇과 같은 것이다. 영성을 추구하려는 목회자는 먼저 비우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
영성은 비우는데서 시작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의 다음 단계는 채우는 것이다. 비움은 채움이 있을 때 의미가 있다. 버리는 것은 얻음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동양의 명상은 비우는 것을 강조한다. 텅 빈 것을 최고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영성을 다르다. 주님은 비우신 후에 그 그릇을 충만으로 채우셨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모습을 “말씀이 육신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하더라”(요 1:14)고 증거 한다.
그 충만 가운데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충만하게 하셨다. 자신을 비우신 예수님을 충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바울은 “아버지께서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라고 기록한다.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사람을 섬기는 사역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주님의 충만은 위에서 아래로 흘러 내려 온 것이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주님은 위에 계신 아버지가 내려주시는 진리와 은혜를 받아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흘러 보내는 일을 하신 것이다. 제자들도 예수님과 똑 같은 일을 하였다. 예수님께서 받은 것을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는 일을 했다. 바로 제자 삼는 사역이었다.
우리 목회자가 해야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연구하고 만들어서 주는 것이 사역이 아니다. 사역의 출발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요한은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 고 기록하고 있다. 그 받은 것을 흘려보내는 것이 사역이다.
우리는 사역의 창조자가 아니라 전달자인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와 은혜의 통로가 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인 것이다.
영성은 균형 잡힌 삶의 모습이다.
예수님의 삶은 균형에서 극치를 이룬다. 비움과 채움, 텅 빔과 충만, 버림과 취하심이 완전한 조화를 이루셨다. 버리는 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되며 채우는 것을 절대화해서도 안 된다. 비움은 채움을 위함이요, 채움은 비움을 위함인 것이다.
영성 생활이란 내면세계로 깊이 들어가는 것이다. 위에서 임하는 능력을 사모하면서도 동시에 내면에서 샘솟는 능력을 열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영혼의 질이 변화되고 장시간에 걸쳐 내면에 감추어진 깊은 영혼이 하나님의 성품으로 변화되는 작업이다. 영성을 추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뿌리 깊게 내리는 것이다,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이시다.
영적 성장과 영적 지식은 비례한다. 세상 교육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기술을 가르쳐 준다. 세상 교육 속에는 교양과 상식이 있다. 그러나 인간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성경 말씀 교육은 이 세상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할 뿐만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준비 시킨다. 도덕, 상식, 교양을 넘어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 성장 시킨다.
우리는 모든 것이 급하지만 하나님은 급하지 않으시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그리고 항상 정확하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님이 귀히 사용한 사람일수록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다.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드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얼마나 큰일을 하느냐보다 우리가 누구인가에 관심이 있으시다.
오래 기다림은 하나님의 사람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영적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셔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하셨다.
때를 분별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신 때를 스데반은 “사십년이 차 매 천사가 시내 산 공야 가시나무 덜기 불꽃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행 7:30)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때를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성급함에 있다.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 있는 동안 인내하는 훈련을 시키셨다. 인내를 통해서 모세에게 나타난 성품이 온유이다. 온유함은 타고난 성품이 아니다. 성령님의 열매이다. 온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고 하나님의 때를 분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 하실 수 있지만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사용 하실 수가 없다.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로 작정 하셨을 때는 그를 광야로 보내어 자아를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결실을 맺는다. 반석이 깨어 질 때 생수가 나온다. 깨어진 주님의 몸에서 보혈이 흘러 나왔다.
깨어지고 낮아짐은 축복이요, 영광이다.
목회자가 일정한 신학적인 수련만 받았다고 온전한 목회자의 자질을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1900년에서 2000년까지의 약 100년 동안 인류는 과학 물질문명의 발달로 비 영성적 세기를 살아 왔다.
이 시대는 과학 물질문명과 이에 수반되는 세속화의 경향으로 영성 관리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이런 상황을 “경건의 위기”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적이고 긴급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영성 관리에 깊은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이는 목회자의 사역이 영적 사역이고 사람의 영혼을 다루는 사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래 사회의 목회자들은 더욱 영성 기능을 강화해야 할 것이며 그 중 우선적인 의무는 자신의 영성 관리와 영성 개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기계와 물질과 함께 살아갈 미래인 들은 신비적인 영적 삶으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는 역행심리가 발달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만이라도 영성적이기를 기대하게 될 것이며, 교회마저 물질로 인한 세속화를 바라지 않을 것이다. 과학 기술이 극도로 발달할 미래 사회에서는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과학 기술이나 물질을 추구하려고 교회에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세상에서는 얻지 못할 영성적인 것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교회는 더욱 영성적 삶을 위한 기능과 프로그램을 개발 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면 목회자의 영성 관리에 필수적인 요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첫째, 쉬지 않고 항상 깨어 기도하는 것이다.
“슈트델트 케니디”는 “기도는 내가 원하는 바를 얻는 쉬운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데로 변화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한다.
목회자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뜻대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가장 가까운 길이 기도이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혼자서 조용하게 기도와 명상으로 하나님과의 교통하는 것을 불필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짙다. 이런 경향은 목회자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의무적으로 하는 새벽 기도회나 철야 기도나 교회 절기에 따라 행하는 특별 기도회 외에 일상생활 가운데 시간과 장소를 선별하여 하나님과 단독으로 대화하는 기도나 명상의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 오늘의 경향이다.
아무리 목회 생활이 바쁘다 해도 목회자에게는 경건 생활의 관리를 위한 기도는 제 일차적인 의무요, 우선일 수밖에 없다. 목회자 스스로의 “기도의 지성소”가 없이 교인들을 기도의 지성소로 불러 모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활을 보면 그는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일과를 마치셨다(막 1:35, 눅 6:12).
더욱이 중요한 일을 결정하실 때에는 하나님과 단독 대화를 하셨다. 그의 생활은 기도하며 일하시고, 일하며 기도하는 생활이었다.
제자를 선택 하실 때도 기도하셨다.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피와 땀을 흘리면서 기도 하셨다.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는 것이 너무도 괴로워서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소서”라고 애원을 하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모든 것을 죽이고 아버지의 뜻에 절대 순종하였다. 이런 결단은 기도 없이는 내릴 수가 없는 결단이다. 기도만이 인간의 뜻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브라함 링컨도 흑인 노예 해방 선언문에 서명하기 전에 먼저 골방에 들어가 생명을 걸고 기도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고서야 자신 있게 서명 할 수 있었다 한다.
적어도 3시간 이상을 무릎으로 살아야 한다고 앞서 간 선배 목사님들은 말씀 하셨다. 기도 없이 하는 사역은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도 “나는 일이 너무 많아서 하루에 3시간이상 기도하지 않고서는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고백했다.
기도 없이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받을 수 없다. 목회자는 기도로 영성을 관리해야 한다. 목회자가 기도하면 기도하는 교회가 된다.
둘째, 영성 관리에 절대적인 요인은 기도와 함께 하나님의 말씀과 깊이 씨름 하며 날마다 그 말씀에 잠겨 있어야 한다.
오 성춘 교수의 그의 저서 목회와 영성에서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말씀을 통하여 정보를 발견하고, 지식을 습득하며, 진리를 깨 닫으려고 하는 지식훈련이고, 또 하나는 생명훈련으로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의 생명을 우리 속에 불어 넣게 하며 우리의 인격을 변화 시키는데 중점을 둔다고 한다.
지식 훈련은 성경에 대하여 많은 지식을 습득하여 성경을 바로 알고, 성경의 교훈과 진리를 바로 배워 그 진리와 교훈에 순종하고자 함이다. 이에 비해 인격 변화와 생명 변화에 중점을 둔 말씀 훈련은 말씀 앞에 나를 세워놓고 말씀 앞에 나를 엎드리게 하고 말씀 앞에 철저하게 순종케 하는 훈련이다.
목회자의 말씀 훈련은 지식 훈련으로서의 훈련뿐만 아니라 철저한 생명 훈련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생명에 계속 바르게 참여케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 훈련으로서 세워져야 한다.
셋째, 목회자의 경건한 삶은 목회자의 영성 관리에 크게 도움이 된다.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경건의 삶을 가르치기 전에 먼저 자신이 경건한 삶의 양식을 가져야 한다. 주님의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는 자신이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되어지는 성령을 소유 했을 때뿐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령을 소유하기 위해 목회자의 경건한 삶은 절대적이다. 하나님을 향해 갈급하며 하나님을 따르기에 열심이며 그의 눈은 언제나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되어 지며 그의 육신과 세상적인 것은 십자가에 못 박으며 그의 사역은 전부성령의 지배를 받게 된다.
지금 세상에 나아가 우리 교회의 지도자에 대하여 존경하는 사람 몇 명의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한참을 생각한 후에 고개를 가로 저을 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교회에도 세상에도 유능한 지도자는 많은데 존경 받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의문이 간다. 세상 사람들이 교회의 맛을 먼저 알고 그 맛을 잃은 교회에 대하여는 사정없이 밟고 지나가게 되어 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쓸데없어 밖에 버리어져 모든 사람들에게 밟힐 뿐 이니라”(마 5:13).
목회자들은 남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책상에 앉아 분주하면서도 자신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노력을 하고 있는 가를 겸손히 반성해 보아야 한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는 남을 가르치는 그 내용대로의 삶의 실존이 그 지도자 자신 안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목회자는 입으로 남을 가르치기 이전에 삶의 본을 보이는 것으로 교인을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삶의 외형적인 모습을 말하는 것이 나이며, 지도자의 영적 자질과 내적 자질까지 포함해서 하는 말이다.
이러한 그릇이 될 때 하나님은 그 그릇 안에 신령한 것들을 채워주신다. 우리 지도자에게 먼저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가 채워질 때 그 신령함이 자연스럽게 배여 나올 것이다.
미래는 영성의 시대이며, 목회자의 올바른 영성에 따라서 교회의 성장이 좌우되는 시대가 된다. 그리고 정보화 사회에 적합한 목회의 기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두드려진 21세기의 특징은 정보 사회이다.
정보 사회에서 가장 필수적인 삶의 도구 중 하나가 정보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보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든 삶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어느 시대나 영성은 요구된다. 하지만 오늘날 이 시대만큼 영성의 필요성이 극대화 된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러므로 21세기는 정보시대이자 영성의 시대인 것이다.
정보화 사회와 영성 시대를 언뜻 보면 전혀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의미로 정보와 영성이란 긴밀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정보란 사회를 이해하는 도구이지 구원하는 도구는 아니다.
사회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사회에 대한 이해가 선행 되어야 한다. 목회자가 정보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영적 미성숙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 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고전 3:2).
우리는 영적 미성숙에 대한 바울의 관심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고린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처럼 영적으로 미성숙했다고 믿기에 충분한 증거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영적 미성숙은 우리 교회의 생존이나 심지어는 우리 사회의 생존의 가장 큰 위협중의 하나일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필요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서 교회에 헌신된 우리가 목회자와 평신도 양쪽 모두의 영적 성숙의 문제를 연구하고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인들은 목회자를 영적 전쟁에서 앞장서서 싸우는 유능한 장수로 생각한다. 자신들은 비록 오합지졸 같은 약한 자일지라도 목회자는 영적으로 능력 있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신도들은 목회자에게 뛰어난 영성을 발견하지 못할 때 비난하기 시작한다. 목회자는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교인들은 설교를 잘하는 목회자를 원하는 만큼 기도를 많이 하는 신령한 목회자를 원한다. 목회자가 영적 자질을 갖추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에 힘써야 한다. 경건한 자세로 성경을 매일 공부하고 늘 자신을 말씀으로 무장하여야 한다. 특히 목회자들이 명심해야 할 일들은 목회자로서의 전문성 분야에 관하여는 비난 받지 않도록 자기 개발에 힘써야 한다.
목회자 목회일 외의 일로 비난 받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목회자로서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면 이는 심각한 일이 된다. 이것을 늘 기억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E.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 방안
1. 목회자의 리더십 특성
지도자의 인격은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이다. 인격은 그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떤 삶을 사는가를 결정한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리더십은 목회자의 인격이며 동시에 그의 생활양식의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목회자의 리더십도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성령의 능력으로 새롭게 변화 시킨 인격이며 그 인격적 성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지속적으로 닮아 감으로써 만들어진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목회자의 리더십의 인격적 특성을 살펴보자.
a. 진실성
“재덕이 겸전한자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진실무망하며 불의한 이를 미워하는 빼서 백성위에 세워 천부장과 백부장과 오십 부장과 십 부장을 삼아”(출 18:21). 진실 된 인격은 생각과 행동에 있어 정직성과 일관성이 있고, 모든 관계에 있어 투명성으로 나타난다.
진실된 인격은 깨끗한 마음을 가진 자이며, 그것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천국 시민의 자질이며 영적 리더십의 덕목이라 할 수 있다.
b. 절제 있는 자기훈련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4-25).
그리스도인에 있어 자기 훈련이란 삶의 모든 부분이 성령의 지배 하에서 훈련되어져 가는 것이다.
목회자의 리더십에는 절제 있는 자기 훈련이 필수적이다. 성령 안에서 자기를 훈련한다는 것은 자기 부인을 통해 자기 십자가를 깨닫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감으로써 날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 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령 안에서 훈련되어지는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 또한 성령 안에서 훈련되도록 인도하게 될 것이다.
c. 열 심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다시는 저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전 5:14-15).
목회자 리더십의 인격적 특성중 하나인 열심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대하여 집중적인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행동하고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열심 있는 지도자는 용기와 희망을 주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촉구하여 넘어진 자를 일으킬 수 있는 자이다. 이러한 열심은 새로운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강권적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d. 결단력
지도자란 정확한 판단력을 가지고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돕고, 결정된 바를 힘 있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특히 목회자 리더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을 바로 분별하여 말씀에 입각한 결정을 내리고, 이를 확고하게 실행 해 나가는 결단력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다.
e. 겸 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 참된 겸손은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을 만날 때 비로써 경험할 수 있는 인격적인 덕목이다. 목회자 리더십에 있어서는 세상이 애써서 촉구하듯이 위를 향하여 자꾸만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십자가에 이르는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들어서 사용하신다(벧전 5:5).
f. 인내력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인내력은 리더십의 중요한 표지이다. 목회자의 리더십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딜 수 있는 인내력이 필요하다.
이 능력의 원천은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이시며, 영적인 지도자는 이러한 전능의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 모든 고난을 인내함으로 승리의 길을 가게 된다.
g. 공 감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며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롬 12:15-16).
공감이란 함께 느끼면서 진실된 관심과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서, 인자와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 안에서 그분과의 진정한 만남과 교제를 나눔으로써 다른 사람에 대한 공감의 능력이 더욱 풍성 해 질수 있다.
h. 경건함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딤전 4:7-8).
경건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것이며, 이러한 경건한 삶을 통해 영적능력이 발휘될 수 있기 때문에 영적인 지도자는 경건의 연습을 생활화 하여야 한다.
i. 사 랑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 이니라”(마 22:37-40).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그 사랑은 지도자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에 힘입어서 사름들을 사랑함으로써 실증된다. 리더십은 사람을 움직이고 그들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들을 변화시키고 그들을 통하여 목적하는 바를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런데 인간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는 열쇠가 바로 사랑인 것이다.
j. 배우는 자세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 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시 25:4).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자이어야 한다. 능동적이고 열정적인 배움의 자세는 삶을 풍요롭게 하고 균형 있게 하며, 새로운 영감을 불어 넣고 정보를 제공하여 혁신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k. 믿 음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찌니라”(히 7:6).
목회자의 리더십에 있어 진실 된 믿음은 필수적이다. 역사상 위대한 영적 지도자들은 창조주 하나님, 주권자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들이었다. 하나님과 그분의 무한한 능력을 믿고 신뢰할 때 위대한 일을 행할 수 있다.
l. 자기희생
“저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요일 3:16).
영적인 지도자는 자기희생의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자기희생이란 예수님처럼 매일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하여 드리고 희생하는 삶의 모습이다. 고난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자기희생의 자취이며 십자가 사건은 철저한 자기희생의 본보기 이다.
m. 섬 김
“저희 발을 씻기신 뒤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 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2-15).
영적인 지도자는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섬기며 동시에 사람들을 섬기는 종의 도를 제일의 원리로 삼아야 한다. 섬기는 리더십은 작은 자와 작은 일을 소중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주님께 하듯 충성하는 삶에서 나타난다.
드 프리(De Pree)는 섬기는 리더십이란 사람들 개개인과 각자의 재능을 중요시하며 그 재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려는 지도자에게서 실천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성장하는 교회의 목회자 리더십의 특징
교회성장을 이루는 목회자의 리더십의 특성을 겐 우드(Gene Wood) 목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논하였다.
a. 자기 확신이 충만하다
교만하지 아니한 자기 확신이 충만하다는 것이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하지만, 자기 확신이 있는 지도자는 그들의 인간적인 약함에 대한 고통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그들을 통해 역사하고 있음을 체험한다. 자연적인 재능과 영적인 은사를 바로 분별한다.
b. 환경에 적절히 반응한다.
환경에 적절히 반응한다는 것이다. 회중의 특별한 요구, 교회의 역사, 문화, 사회적 환경, 유용한 자료들을 모으고 준비된 전략들을 개발한다. 즉 환경적 요구에 적응하기 위하여 자신의 스타일을 변화시키거나 훈습된 원리들을 상황에 맞추어 이동 시킨다.
c. 비전에 초점을 맞추고 사명에 집중한다.
비전에 초점을 맞추고 사명에 집중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자극이 있을지라도 그것에 당당히 직면하며 비전을 향해 나아가고 잃어버린 영혼들의 구속을 위한 사명을 다하는데 열정적이다.
d. 우선순위를 알고 행한다.
우선순위를 알고 행한다는 것이다. 부차적인 것들에 관한 생각과 그것들을 위한 노력으로 인해 고통 받지 않고 복음 전도가 최고의 우선순위라는 신념이 삶의 실천으로 나타나도록 한다.
e.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하다.
자신에게 정직하고 성실하다는 것이다. 항상 자신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강점과 약점을 체크하며, 자기 발전을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성도들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고, 갖추고 있는 지도자 보다는 계속적으로 자신을 엎 그레이드 시키는 지도자에게 인도되기를 원한다.
f. 인격적, 도덕적 실패의 유혹을 물리친다. 인격적, 도덕적 실패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것이다.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중심을 잃고 평정을 잃어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인격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책임을 질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g. 다양한 요구에 맞게 리더십 스타일을 조정한다.
다양한 요구에 맞도록 리더십의 스타일을 조정한다는 것이다. 확고하면서도 부드럽게, 자기 확신이 있으면서도 조심스럽게, 심각하면서도 유머스럽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사람들에 대해서는 유머스럽게, 기도하면서도 담대하게, 사람 중심적이면서도 업무 중심적으로, 사람을 역설적으로 다루는 리더십 기술이 있어야 한다.
h. 앞서서 여러 단계를 생각한다.
앞서서 여러 단계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자세를 함께 견지하면서 항상 앞서서 단계를 생각하며 승리를 예측하는 전략가가 되어야 한다.
i. 정보와 참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정보와 참여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관련된 모든 사람들이 계획을 발전시키는데 참여할 적절한 기회를 부여하고 정보를 재빠르고 예민하게 그리고 수용적인 자세로 분석해야 한다.
j. 예측하지 못한 변수에 지혜롭게 대처한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 우연한 상황들에 지혜롭게 대처한다는 것이다. 예측하지 못한 변수를 처리할 방법들을 찾아내고 우연한 상황들을 현실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도들이 목회자 리더십에 의문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
j. 분열의 죄를 다룰 준비를 한다.
분열의 죄를 다룰 준비를 한다는 것이다. 통제 되지 않은 부정적 사고들과 행동들은 공동체 안의 암적 존재이다. 이에 대해 신중하게 성경적으로 맞서야 하며, 분열을 조장하는 부정적 사고와 행동의 소유자들은 절대로 지도자로 세워서는 안 된다.
k.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지하고 있는 것을 통해 무난한 것으로부터 실행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을 개인적으로 끌어 들이고 부표가 아닌 가표를 중시하여 긍정적으로 일을 추진해 나가야 한다.
l. 비전을 갖도록 격려하고 지지한다.
비전을 갖도록 격려하고 지지한다는 것이다. 성도들 스스로 비전을 세우고 그것을 위한 목표를 끌어내도록 격려하고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m. 진정한 합일점을 갖도록 한다.
진정한 합일점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전체적인 큰 그림을 머릿속에 늘 간직하고 그것에 대한 합일점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세부 사항을 놓고 고집대로 하겠다고 버티기 보다는 보다 큰 합일점을 기억하며 용납하고 협력하여야 한다.
n. 저항에 위축되어서는 안 된다.
저항에 위축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패한 교회의 역할 구도 상 지도자에 대한 저항은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하는 문제이다. 반가운 일은 아니지만, 저항에 위축되거나 실망 할 필요는 없다.
o. 교회의 변화를 항상 체크한다.
교회를 변화를 항상 체크 한다는 것이다. 어는 정도의 갈등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변화가 없이는 성장도 있을 수 없으므로 항상 교회의 변화를 체크해야 한다.
p. 번복을 피해야 한다. 번복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자가 자신의 뜻과 계획을 번복하게 되면 그의 지도력을 따르기로 준비했던 사람들로부터의 존경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철저한 준비와 단호한 결단으로 번복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q. 분노를 자제 하여야 한다.
분노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내는 것은 분명 죄이다(엡 4:26, 잠 12:16), 분을 발할 때도 지도자는 여전히 공인이며, 성령의 열매인 절제를 잃게 되는 것이므로 그 순간 성령의 지배를 벗어나 있다는 것을 공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지도자로서의 신뢰도를 떨어뜨리게 됨으로써 지도력에 손상이 온다.
r. 행동 중심적이고 담대하여야 한다.
행동 중심적이고 담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급하게 행동하는 것도 실패를 가져오지만 행동하지 않는 것도 큰 실패를 가져온다.
s.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3.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 전략
목회자의 리더십 개발이란 교회의 기능을 원활하게 하는 열쇠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완벽한 리더십을 갖춘 목회자는 없다. 리더십은 꾸준히 개발되고 훈련되어져야 한다. 리더십은 개발 될 수 있고 개발 되어야 한다.
a. 자기 평가
지도자는 태어나기도 하고 만들어지기도 한다. 태어 날 때부터 리더십의자질과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부분이 있는 것도 분명하며, 리더십 기술이 촉진되고 개발 될 수 있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런데 타고난 리더십 자질과 능력이 때로는 개발과 훈련에 들어가기 전까지 숨겨져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리더십은 분명 개발될 수 있고 개발 되어져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이 리더십에 대한 객관적인 자기 평가가 필요하다. 또한 보다 발전적이고 온전한 리더십을 갖추기 위한 리더십 개발에 있어서도 현재 자신의 리더십에 있어 부적절하고 불충분한 부분은 무엇인지 진단하고 개선하기 위해 자기 리더십에 대한 평가는 필수적이다.
b. 올바른 비전 진술
바람직한 리더십이란 올바른 비전을 진술하는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비전 진술이란 어떤 것인가?
올바른 비전 진술을 가늠할 수 있는 전략적 기준들은 ① 다른 교회의 비전 진술과 비교할 때 당신의 교회를 특별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는가?
② 당신의 교회 사역을 통해 영향을 미치기 원하는 사역 대상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는가?
③ 이것을 토대로 하여 미래에 대한 분명하고 독특한 방향으로 사역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④ 사역에서 활용되는 전략과 방법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는가?
⑤ 사역이 추구하는 바를 명확히 함으로써 사람들이 교회 사업에 참여하는 일에 흥분되게 할 수 있는가?
⑥ 교회가 추상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을 다 해준다는 생각을 막을 수 있는가?
⑦ 정기적으로 출석은 하지만 비활동적인 성도들로 하여금 비전에 의한 사역의 방향에 감동 할 수 있도록 하겠는가? 등이다.
비전은 사역에 있어 방향을 제시한다. 비전은 지도자나 그 사역 단체에 동참하고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장래에 대한 초점을 맞추게 한다.
c. 행정적 리더십
목회자의 행정적 리더십이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에 근거하여 목적과 목표들을 설정하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사역 계획과 조직, 위임, 자원의 활용, 지도 및 통제 등의 행정적 과업 수행하는데 필요한 지도력이다.
⑴ 계 획
계획은 성공적인 행정적 리더십의 기초가 되는 것으로, 지도자의 여러 활동 중에서 중요한 기능으로 간주된다. 계획은 지도자가 성취하기를 원하는 것과 그 성취 방법을 미리 사고해 나가는 과정이다.
계획이란 미래를 정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며 장래에 성취할 것에 대한 구도를 그려나가게 함으로써 현재의 정체된 상태를 역동적으로 전환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이러한 계획의 과정에는 연구와 분석, 대안 고려 및 미래에 대한 사려 깊은 결정들이 포함 된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어떤 상황 하에서 수행하는 것인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하여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미리 결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획 과정을 거치는 동안 성급한 판단과 위험한 행동은 피 할 수 있게 된다.
⑵ 조 직
목회자 리더십이 감당해야할 두 번째 과업은 조직이다. 교회는 성도들의 다양한 은사를 개발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데 활용 되도록 수직적, 수평적 구조를 확립하고 각 성도들을 적합한 부서에 배치하여 일하도록 하여야 한다.
⑶ 위 임
조직체는 그 구성원들에게 골고루 권한과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개개인의 능력이 개발되고 상호간에 협력하여 조직체의 목표를 성취하는데 기여하도록 해야 한다. 교회 또한 위임을 통하여 모든 성도들이 각자의 은사를 개발하여 사역에 동참하게 함으로써 교회 사역을 성취하기에 이를 것이다.
유능한 지도자는 지도자 자신이 과도한 짐을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짐을 함께 나눌 능력 있는 사람들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이 일은 책임과 권한의 위임을 통해서만 가능하며 위임이 없이는 어떤 조직체도 효과적으로 그 기능을 발휘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 역시 교회의 잠재적 자원인 평신도를 개발하여 그들에게 권한과 책임을 위임함으로써 함께 협력하여 하나님의 과업을 성취해야 한다.
⑷ 동기 부여
동기부여란 조직체의 구성원들이 특정한 행동을 하도록 격려하고 힘을 북돋우며 촉구하는 지도자의 일이다. 동기란 인간 내부의 필요, 갈망, 충동 또는 추진력으로서 개인이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
목회자의 리더십에 있어서도 이 동기 부여의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이는 성도들의 영적 성숙을 지향하며 사역에 참여하여 필요한 행동을 하도록 그들을 움직이고 감동 시키며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이라 할 수 있다.
⑸ 결 정
결정하는 일은 리더십에 있어서 실로 중요하면서도 가장 어렵고 가장 큰 모험이 따르는 일이다. 한 번의 잘못된 결정이 교회 전체 뿐만 아니라 또 한 지도자 자신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는 상황들의 분석과 더불어 영적 분별력을 발휘하여 올바른 결정들을 내려야 한다. 리더십은 크게 지도자의 결정 능력에 의해 평가될 수 있다.
엥스트롬(Engstrom)은 “올바른 방향으로 훌륭한 결정을 할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유능한 리더십의 주요 표지”라고 하였다.
⑹ 지도 및 통제
리더십에 있어서 지도란 사람들로 하여금 필요한 행동을 취하게 하기 위해 결정을 도와주고 의사소통하며 지지와 격려를 통해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을 개발시켜 나가는 총체적인 일들을 말한다.
그리고 통제란 일의 전진과 완성을 평가하기 위해서 행하는 것으로서, 목회자의 리더십에 있어서의 통제는 목표 지향적인 사역이 진행되고 있는가의 여부를 점검하는 수단이 된다.
즉 통제는 평가를 위한 긍정적인 과정이며 그 궁극적인 목적은 조직체의 향상을 도모 하는 것이다. 이러한 통제는 교회가 무의미한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부단히 올바른 목표를 향해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들은 모든 사역 영역에 통제 기술을 활용하여 목표 달성의 여부를 확인하고 점검하여 수정, 보완 작업을 해나가야 한다.
⑺ 지도자와 지배자
우리는 세상의 많은 지배자와 지도자를 혼돈해서는 안 되며 개념적으로 분명하게 구분하여야 한다. 지배자와 지도자의 다른 점은, 첫째 오늘날 사회의 지도자라 하면 남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자를 말한다. 나라의 정권을 잡은 정치인들, 기업의 회장이나 사장들, 그리고 모든 기관의 장들을 말한다. 이들은 사회나 단체의 통솔자이다.
권력을 잡아 권좌에 앉은 지배자들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말하는 지도자는 정신을 지배하는 자요, 다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켜 따르게 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지도자는 먼저 실천하는 자요, 먼저 섬기는 자요, 인도자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둘째, 지배자는 살아서 역사를 지배하고, 지도자는 죽어서 역사를 움직인다.
셋째, 지배자의 자리는 다스리기 위하여 군림하는 것이요, 지도자는 남을 겸손하게 섬기는 자이다.
넷째, 지배자는 통솔력을 가져야 하며, 지도자는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 통솔력은 외적인 조직과 권위를 창출할 수 있으나 지도력은 인격적 감화로 이루어지는 내적 영향력이다.
다섯째, 지배자는 명령으로 사람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나. 지도자는 감화로 순종케 한다.
여섯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지배가 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그것은 영화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도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유익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좁은 길이다.
일곱째, 하나님은 어느 시대나 지배자 보다는 지도자를 찾고 계신다. 그것은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시고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여덟 번째,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께서 강력한 정치적 메시야로 군림하시기를 바랬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과 죽음을 통해서 섬김과 사랑의 길을 택하시고 또한 제자들에게도 그 길을 따르라고 하셨다.
F. 미래의 성공적인 목회자 상
사람은 누구나 자기중심에서 다른 대상을 바라본다.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이 말해 주듯이 나 자신을 아는 것이 곧 세상을 아는 길이다. 그런즉 나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참된 자신을 아는 것이 최우선적인 것이 될 것이다. 참된 목회자가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을 스스로 무엇보다도 잘 알아야 한다.
신앙은 주체적 결단이다. 인간은 자기 대상 경험과 주체적인 결단을 통하여 자신의 미래를 창조한다. 이처럼 목회자도 내면화된 이미지를 모델로 하여 자신의 목회 사역을 하게 된다. 이러한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백성 전체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이므로 특정한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사역에서 목회자의 이미지를 찾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널드 매서는 기독교 사역의 현대적인 목회자 이미지를 찾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이유를, 이미지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여주고, 사무실에 앉아 단순히 주어진 역할에 부합하며 기대나 충족시키는 차원을 넘어 설수 있는 정체성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목회자들은 자기 직업에 묶여서 소명을 확실하게 자각하지 못하고, 동료나 선배 목회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쉽게 절망한다. 하지만 자기 교회의 모호하고 실망스러운 현실을 잘 견디면서 앞으로 일어 날 일에 대한 열망과 기대를 잃지 않는 목회자들은, 보통 자신의 소명과 직업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문제를 들어 줄 정도의 개방성을 보여주고, 그들의 소명과 관련된 문제들을 논의해주고, 사역의 이미지를 촉진해 줌으로서 인생의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을 격려해 주고 지탱해 줄 수 있다.
사역이란, 사랑하고 돌봐 주는 사람이 되라는 도전이다.
목회자는 설교하고, 행정을 담당하고, 예배를 집례 하는 등의 기능적인 역할을 넘어서 세속적인 사람들 가운데에서 거룩함을 상징화하고, 개교회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더 많은 비전을 재현하며, 상한 자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손을 내밀면서 지도력의 자리에 서도록 부름을 받는다.
두 번째 이유는 무엇이 긴급한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의식을 재발견 하리라는 희망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치, 경제, 군사문제, 등 현실과 관련된 것들이다.
목회자는 국가와 개인이 전쟁과 가난에 처해 있는데 그저 설교에 대한 묵상하고 준비하면서 자신의 연구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그 존재로서 자신이 속한 사회가 밝아지고 더 나아가서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여기서 목회자는 제사장 의식과 함께 예언자적 의식이 필요하다.
세 번째 이유는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신앙 공동체를 조직하는 동기와 방향 감각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혼동이 아니라 우리가 기독교인임을 확실하게 믿지 못하는 불신앙에 있다. 현대 목회자들에게는 복음과 구원에 대한 열정 못지않게 자기 자신의 신앙에 대한 정체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하다.
신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비교적 큰 교회에서 봉사한다고 해서 목회자로서 모든 것을 갖춘 것은 아니다.
목회에 대한 신약성경의 이미지는 “사역(ministry)”이다.
사역은 교회 공동체 용어가 아니라 일반적 용어이다. 사역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섬김(diakonia)이고, 이것은 목회자와 평신도 모두에게 해당되는 단어이다. 이 단어에 기초한 영어식 정의는 봉사이다.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더 고대적인 뜻은 “웨이터”였으나 우리는 초대교회 공동체에서 식사를 수종들 던 혹은 봉사하던 사람들로부터 이 용어의 최초의 의미가 나왔으리라 생각할 수 있다.
신약성경에서 빈번하게 사용된 또 하나의 단어는 “종(doulos)” 혹은 “노예”인데, 오늘날 우리에게 매우 낯설고 반감이 생기는 이 단어는 직위나 관계를 전달하기 위해 쓰였다.
임 택진 목사가 저술한 목회자가 쓴 목회학이란 책에서 소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의 하였다.
소명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곧 일반 소명과 특수 소명이다.
일반 소명이란 그리스도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특수 소명은 목사로서의 소명을 말한다.
특히 목사직은 누가 억지로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부름을 받아야 하며(고전 1:1)하나님의 은혜로 부름을 받은 자(갈 1:15)가 감당해야 하는 직분이다.
또한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어야 하며(롬 1:1)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되어진 직분이다(딤전 1:1).
이러한 자는 주께서 충성 되이 여겨 직분을 맡긴 자(딤전 1:12)라고 할 수 있다.
교회는 21세기의 전환기를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은 언제나 연구하고 시대에 적합한 목회를 도입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은 영원한 진리이다. 그분은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라고 말씀하신다.
역사적으로 볼 때 교회는 오히려 상황이 나빴을 때 최선의 것을 일구어 낸다. 번영의 시기에 결코 잘해 온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교회는 역경의 시기에 더욱 왕성해 진 것이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계시의 말씀과 그 시대적인 적절성을 결합할 수 있어야 한다. 교회가 계시 없이 시대적인 절적성만 갖는다면, 그 메시지는 시대적이지만 진리를 결핍한 것일 수밖에 없다.
한편 교회가 시대적인 적절성 없이 계시의 말씀만 가지고 있다면 그 메시지는 진리 그 자체로서 그치게 될 뿐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21세기, 미래의 목회자는 여러 가지 커다란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직면하여 목회자들은 얼마나 성공적으로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까?
올리버 홈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뒤에 놓여 있는 것과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놓여 있는 것과 비교할 때 지극히 작은 문제이다.”
내적인 인격과 관련된 이 말 속에는 진리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더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우리 뒤에 놓인 것과 우리 앞에 놓인 것은 우리 안에 사시는 분과 비교 할 때 지극히 작은 문제이다”
내주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목회자로 하여금 21세기를 향해 전진할 수 있게 한다.
교회가 21세기를 향해 나아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지도력을 새롭게 인식하는 일이 필요하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과거의 삶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긴 삶의 여정이 어디로 이끌고 갈지를 알지 못하였다. 다만, 예수님이 그때까지의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셨다는 사실만이 그들이 알고 있던 전부였다.
예수님은 뭔가 새롭고, 달랐고, 매혹적이셨다.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삶은 쉽지 않았지만, 세상을 영원히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예수님과 그분의 교회에 속하기를 원했다. 그들은 주님께 헌신하였기 때문에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오늘날의 목회자나 교회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되도록 도전을 받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21세기를 나아갈 때 큰 열정과 흔들리지 않는 헌신과 높은 희망을 가져야 한다.
Ⅲ. 結 論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구원 사역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나타났으며(엡 1:4-5),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과 영원한 복락에 참여하게 되는 길은 복음을 믿는 신앙 안에서이다.
복음의 능력은 우리 마음을 조명하는 일, 즉 성령의 새롭게 하는 일에 의해서만 나타나며, 그러므로 모든 구원 사역은 하나님의 자신에게 속한 것이다.
하나님은 이 사역을 위하여 성직이라는 직분을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므로 모든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목회 사역이며 인간의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수종을 드는 일이다.
이 구원 사역은 복음 사역에 의해 역사상에서 진행 되는데 목회자라는 인간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전달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성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선포자였다.
그의 제자들도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설교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선포하였다. 초대 교회 제자들의 주된 임무도 설교자의 역할이었다.
중세 교회에서는 비록 의식이 말씀보다 중요시 되었으나 복음 설교는 수도원 등의 설교에서 계속 중요하게 생각되어 졌다. 그러다가 종교 개혁기에는 성서의 재발견과 더불어 말씀 선포의 설교가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로 부각 되었다.
또한 현대 교회에 와서는 설교가 중심이 된 부흥 운동과 또 20세기의 신 정통주의 신학 등으로 하나님 말씀의 설교자로서의 목회자상이 강조 되었다. 한국 교회에서도 목회자상은 설교자로 나타났다.
한국의 목회자들 역시 설교를 매개체로 복음을 전파 했고, 따라서 설교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다.
성경 중심의 설교가 지난 100년 동안 한국 강단을 지배해 왔다.
오늘의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선포자로서 오직 성경 중심의 호소력을 가지고 변화하는 상황에 알맞게 응답하는 설교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선한 목자였다. 그는 양들을 아끼고 그들에게 관심을 보이며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목자였다. 초대교회의 목자들 역시 목자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투르나이젠은 칼빈을 인용하여 교회 훈련으로서의 목회가 바로 일반 목회에서 이야기하는 목양이라고 하였다.
그는 설교와 성례전과는 다른 보조수단으로서의 목양, 즉 개개인과 대화하는 목양을 이야기 하였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처음에는 복음 전도에만 심혈을 기울였으나 교회가 조금씩 커지기 시작하면서 가르치는 자로서의 목회자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목회자 자신이 성장과 훈련 뿐 아니라 교인들을 훈련, 양육하는 목자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성도들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민주의식을 일깨워주며, 길을 인도하는 목자로서의 모습이 나타났고, 그다음에는 자신들이 직접 역사에 참여함으로써 양들을 이끄는 목자요, 또한 심령의 치유자로서, 소외당한 사람들의 친구로서의 목회자상이 나타났다.
목자로서의 목회자는 기독교의 복음이 무엇인지 차분하게 가르치고 오늘날 교회가 처한 현실이 어떠한가, 이해시키며 교회가 당면한 역사적 소명을 깨닫게 하여 양 떼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바르게 영위할 수 있도록 교육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목자로서의 목회자는 양 떼 위에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양들의 본이 되어 앞서 실천하며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고 가르치며 양육 할뿐 아니라 때로는 권징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 생활과 사회생활을 올바르게 영위 할 수 있도록 촉진하며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 특히 1960년대 이후에는 목회자의 역할 중 상담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오늘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억눌리고 소외당하며, 슬픔에 빠져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사랑으로 격려하고 희망의 복음을 전하며 죄에 눌린 사람들에게 죄의 회개와 용서를 대화를 통하여 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을 받게 도와주는 목회 상담자는 미래의 바람직한 목회자상이라 생각되어진다.
“목회자가 무엇이냐?” “왜 목회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문제들은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그 양들을 먹이는 모든 목회자들의 공동의 연구 과제로 삼아야 한다. 따라서 이런 과제들을 다시 풀어 보면, 다음과 같은 실제적인 문제들이 내포되어 있다.
그것은 예배와 선교, 설교와 교육, 심방과 상담, 행정과 재정, 교계와 대 사회 문제 등이다.
그리고 이런 구체적인 과제들을 훌륭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끊임없는 자질 향상을 위한 깊은 관심과 부단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위의 모든 과제들은 교회의 생명과 직접 간접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들은 어느 한 교파나 특정 지도자에 의해서 연구 될 문제가 아니라 한국 민족을 위해 부름 받은 전체 목회자들의 공통 관심사가 되어야 할 것이며, 그 연구 결과의 혜택을 고루 나누어야 한다.
한국 교회의 앞날은 현재 교회를 섬기는 목회자들의 지도력에 따라서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수도 있고 영광 받으시게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소명을 받은 목회자들은 정직하게 맡은 사명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현대인에게 가장 강하게 인식되는 21세기의 특징은 “정보 사회”이다. 정보 사회에서 정보는 가장 필수적인 삶의 도구중 하나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보만 가지고 산다고 하면 그것으로는 부족하다.
어느 시대에나 영성은 요구된다. 하지만 21 세기만큼이나 영성의 필요성이 극대화된 적은 없다.
그러므로 21세기는 정보사회이자 영성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정보 사회와 영성 사회는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위와 같은 의미로 정보와 영성이란 긴밀한 관련성을 갖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정보를 아무리 많이 갖고 있어도 그것으로 사회를 구원할 수 없다. 사회를 구원하는 정답은 영성에 있다. 사회를 구원하는 요인이 되는 영성은 21세기에 매우 중요하게 부각되며 사회가 이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미래학자들이 예측하는 영성의 시대, 이단과 사이비의 시대라는 미래 현상은 과학 기술과 조직 사회에 대한 거부 작용으로 나타나는 사회 종교 현상이다. 영성 시대에 교회와 목회자가 건전한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지 못한다면 사회는 건전치 못한 영에 미혹되게 된다. 이는 이미 성경이 증거하고 있다.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마 24:11).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고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
영적인 그리스도인과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으로 양극화가 될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칼 라너도 이러한 양극화 현상을 가리켜 “오늘날에는 신비주의자가 되든지 불신자가 되든지 신속히 결정해야 할 시간이 빠르게 닥아 오고 있다. 영성의 양극화는 빛의 속도와 같이 급속히 우리 가운데로 다가오고 있다.”
달란트 비유는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말기에 주신 종말에 관한 가르침의 한 부분이다. 마태복음의 달란트 비유와 누가복음의 므나 비유는 같은 내용의 비유이다. 이 비유의 결론은 “있는 자는 더 많아져서 풍성하게 되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것이다.
종말에 관한 비유의 결론이 양극화 된 것은 종말적 현상중의 하나가 양극화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여러 가지 면에서 양극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은 종말이 가까워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21세기에 들어서 영성이 있는 자들은 더욱 간절히 준비하며 풍성해 질것이고 없는 자는 있던 것마저 빼앗기는 영적 빈곤상태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영성적 양극화 시대에 사람들은 영성이 풍부한 부류와 영성을 상실한 부류로 나뉘게 된다.
현대 교인들의 교회 선택 기준도 이제는 교파와 교단에서 영성과 편의성으로 그 중심이 이동하고 있다. 교단에 관계없이 영성적인 교회를 선호하는가 하면 편의성이 충족되는 교회를 더더욱 선호하게 되었다.
성도들은 누구나 교회에서 영적 감동을 받기 원한다. 따라서 이러한 영적 욕구를 충족 시켜 주는 교회와 목회자를 선택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성도들은 편리한 교회, 주차와 휴식이 용이한 교회를 선택하게 된다. 주차장은 이제 더 이상 사치가 아니라 필수 요건이다.
미래 교회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해 질것이다.
영성적으로 우수한 교회. 영성적으로 우수한 목회자, 접근이 용이하고 주차하기 쉬운 시설을 두루 갖춘 교회, 교단과 교파에 관계없이 교회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교단이나 교파의 프리미엄보다 교회의 영성적 질을 높여야 한다.
즉 21세기는 목회 기술이 아니라 목회 영성이 지배하는 시대이다.
목회자 개인의 영성은 바로 미래 교회의 생명이다.
성도 개인의 영성이 사회의 생명이 된다.
기독교인 가운데 약 20%가 점복이 과학적 근거가 있다고 답하고, 19%는 통계학이라고 대답한다고 한다. 더욱이 놀랄만한 것은 그 20%의 신도들 가운데 15%가 가끔 점을 본다고 대답하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약 20%가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약 천만 명이 되며 그중에 150만 명이 점을 본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한국 기독교의 영성 교육에 문제가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결과이다.
최근에는 사이버 시대에 걸맞은 사이버 점복이 얼마나 유행하는지 모른다. 젊은이들이 모이는 곳에는 반드시 사주, 팔자, 궁합, 작명 등을 해주는 점쟁이가 있다. 이들은 이전처럼 도포를 입고 앉아서 엽전이나 쌀을 던지며 점을 치는 사람들이 아니다. 컴퓨터 앞에 앉은 양복에 넥타이를 맨 점쟁이 들이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공간에도 사이버 점쟁이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리고 신문이나 잡지에 등장하는 오늘의 운세를 우리 대다수의 기독교인들도 매일 같이 본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과학과 기술의 시대, 정보의 시대에 전혀 과학적이지 않은 점복이 유행하는 것은 영성 시대의 또 다른 커다란 적이다. 교회와 목회자는 이러한 비기독교적 영성을 대적하고 기독교적 영성을 사회에 제공하기 위하여 영성적 노력을 그 어느 때보다 기울여야 할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이 범하는 가장 심각한 잘못은 설교를 선포적인 사건으로 여기지 않고 치료 과정으로 만드는 것이다.
설교의 초점은 듣는 이들에게 자기 힘으로 일어 설수 있는 방법을 일러 주는데 있지 않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에게 그들의 삶을 고치며 그들의 태도를 바로 잡는 방법에 대해 조언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거부할 수 없도록 강력하게 설교하기 위해 설교해야 한다. 교인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살아 갈수 있도록 생명 걸고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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